
드레스룸과 욕실이 함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집. 817디자인스페이스 임규범 대표는 오롯이 클라이언트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집의 위계를 다시 세웠다.
미니멀 라이프는 집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화려한 빌딩 숲 사이로 이따금 비행기가 스쳐 지나가며 낭만을 더하는 서울의 야경. 그 풍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침대 옆에는 독특하게도 다이닝 테이블과 주방이 있다. 건너편 방에는 드레스룸과 욕조, 샤워 부스가 함께 있는데, 서로를 구분하는 문조차 달려 있지 않다. 예상 밖의 레이아웃은 물론 온통 흑백영화처럼 절제된 컬러 팔레트로 집주인의 취향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이 집은 IT 개발자로 일하는 50대 부부가 사는 미니멀 하우스다.

침대를 대각선으로 배치한 덕분에 탁 트인 파노라마 뷰를 더욱 만끽할 수 있다.
평생을 맥시멀리스트로 살던 부부는 언젠가부터 너무 많은 물건을 끌어안고 사는 삶에 피로를 느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가장 본질적인 생활로 돌아가고 싶던 그들은 집을 바꾸는 것으로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어레인지먼트를 시도했다. 두 사람의 추구미가 담긴 집을 한 채 만든 다음, 몸만 옮겨와 살면서 이전 집에서 꼭 필요한 물건만 하나씩 가져오는 방식을 계획한 것이다. 오늘은 면도기 하나, 내일은 헤어드라이어 하나 들여오는 식으로 적응기를 거친 뒤, 더 이상 집에 가져오고 싶은 물건이 없어졌을 때 부부는 이전 집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동굴처럼 어두운 분위기의 복도. 부부만의 공간에 왔음을 알리는 전이 공간으로 역할한다.
이들의 홈 어레인지먼트를 함께 한 디자이너는 817디자인스페이스 임규범 대표. 부부는 자신들의 삶에 맞춰 탁 트인 레이아웃을 제안해준 과감함이 마음에 들어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14년 차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임규범 대표에게도 이 집은 매우 인상적인 작업으로 남아 있다. “자녀가 없고, 반려동물도 없고, 손님도 오지 않는 집이었어요. 부부가 함께 지내는 시간으로 충분했기에 크게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퇴근한 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분들이었죠.”
진정한 미니멀리즘이란 이런 것
임규범 대표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부부가 별장처럼 머무는 집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 상상하며 디자인을 하나씩 결정해갔다. 삼면이 모두 열린 드넓은 파노라마 뷰가 이 집의 독보적 장점이었고, 열린 공간이 부부의 취향이기도 했기에 배치는 최대한 간결하게 구성했다. 방 세 개와 거실까지 있던 곳은 침실과 다이닝, 주방이 모인 하나의 휴식 공간이 되었고, 마스터 베드룸은 드레스룸과 욕실이 결합된 준비 공간으로 바뀌었다.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라 주방과 다이닝은 최소한으로만 확보하고, 대신 취미 생활을 위한 서재를 숨은 공간처럼 따로 두었다.

바닥과 천장 모두 경계 없이 깨끗하고 평탄하게 마감해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살렸다. 데살토의 클레이 테이블, 비트라의 하트 콘 체어, 에코스마트 파이어의 난로 등 집의 아이템은 모노톤 혹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통일했다.
부부가 가장 필요한 단 하나의 물건만 남긴 것처럼, 전체 레이아웃이 정해진 후 임규범 대표는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는 최후의 선과 면으로만 공간을 완성했다. 평탄하고 깨끗한 천장, 블랙·화이트·그레이로 통일한 색감, 무광 스테인리스 스틸과 목재·타일·도장만 사용해 마감재를 최소화한 것이 그 결과물이다. “미니멀리즘은 불필요한 요소를 하나라도 더 덜어내는 데서 구현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재와 화장실을 제외하고 문도 달지 않았죠. 천장 또한 어떤 요철도 없이 광활하게 느껴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천장등 대신 필요한 위치에 스폿 조명을 배치하고, 기둥 뒤에 간접조명을 설치해 부족한 조도를 보완했어요. 그 결과 냉난방기의 바람이 나오는 아주 얇은 라인 디퓨저만 둔 간결한 천장이 완성됐습니다.”

수전을 비롯한 가구는 그레이 컬러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마감해 제품을 제외하면 마치 흑백사진처럼 느껴진다.
천장 못지않게 경계 없는 바닥은 클라이언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결과다. 부부는 외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처음과 같은 상태로 깨끗하게 투숙객을 맞이하는 호텔 같은 집을 바랐다. 이곳에서는 로봇 청소기가 하우스키퍼 역할을 담당한다. 문이나 문턱이 없는 것, 다리가 십자 형태인 비트라의 하트 콘 체어와 원형인 볼 체어, 다리가 하나인 데살토의 클레이 테이블을 고른 것, 행잉 TV를 설치한 것 등은 모두 로봇 청소기가 어딘가 걸리는 부분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두 사람만을 위한 유토피아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철저히 반영한 집에는 샤워기, 변기, 헤어드라이어까지 모든 생활 도구에 한 사람당 하나씩 각자의 자리가 있다. 냉장고에는 음료수가 오와 열을 맞추어 진열돼있고, 컵도 각각 하나씩 딱 두 개만 두었다. 드레스룸에 걸린 옷과 신발은 모두 까만색이다.

드레스룸과 구분하는 문 없이 열린 배치의 욕실. 바닥을 낮출 수 없는 상황이라 역으로 바닥을 높여 배수의 흐름을 만들고 가장자리에 트렌치를 안전장치로 설치했다.

부부의 취향을 담아 까만 옷으로만 채운 드레스룸. 수전도 각각 하나씩 각자의 자리가 있다.
공간과 생활의 지향점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집에서 부부는 매일 최적의 만족감을 경험한다. 밤에 콘서트 영상을 틀고 볼륨을 높이면 도시의 야경과 어우러져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콘서트장이 되고, 퇴근 후 단골 가게에서 포장해온 스시에 와인을 곁들여 먹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저녁엔 그 어떤 레스토랑보다 훌륭한 다이닝 공간으로 변신한다. 부부는 미니멀하게 디자인한 집에 자신들의 생활 또한 완벽하게 동기화하며 비로소 꿈꾸던 미니멀 라이프를 이뤘다.

침실에서 바라본 드레스룸. 이곳에도 문을 따로 달지 않았다.
삶과 집을 대하는 부부의 태도는 디자이너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사 후에 욕실에서 샤워할 때 춥지 않은지 여쭤보며 원한다면 유리문을 설치해드리겠다고 했을 때, 크게 불편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공간감에 유리가 놓이면 의도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계신 거였죠. 고급스러운 마감재를 쓰거나 공예가 집의 일부가 되는 인테리어도 물론 좋지만, 디자이너의 의도를 구현하고 그것이 클라이언트의 라이프스타일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공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하이엔드적 면모라 생각합니다. 두 분은 저희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100% 이상으로 잘 사용해주셨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는 그동안 해온 작업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의 프로젝트입니다.”
817디자인스페이스
2012년 임규범 대표가 설립한 스튜디오로, 미니멀리즘에 기반한 건축과 인테리어를 전개하고 있다. 섬세한 시선과 절제된 조형 언어를 바탕으로, 공간과 사용자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작업을 만들어간다. @817designspace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