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형상을 찾아서 건축가 조정구

45일간 이어진 전시를 마치고 마지막 단풍이 지나던 날, 구가도시건축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곳에서 수많은 답사와 설계의 결과물이 탄생했다.
건축가 조정구는 구가도시건축을 개소한 이후 줄곧 ‘우리 삶과 가까운 보편적 건축’이라는 주제에 몰두해왔다. 그 방향성은 두 가지 방법으로 발현되었다. 도시 답사 그리고 집을 설계하는 일이다. 2000년 11월, 사무소를 열면서 시작한 ‘수요답사’는 수많은 동네와 집을 기록하며 지금까지 1천1백 회 넘게 이어졌다. 그의 건축은 그렇게 무수한 삶의 형상을 탐구하며 다진 토양 위에 뿌리내리고 있다. 답사에서 얻은 배움이 설계의 실마리가 되고, 설계 과정에서 떠오른 질문이 답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며 주고받은 시간이 지금의 구가도시건축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건축가가 도시를 향해 자신의 논리를 주장할 때, 그는 조심스럽게 건축 과정에 개입해 도시와 개인의 시간을 잇는 작업을 한다. 도시 풍경에 자연스레 스며들면서 건축주의 생활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건축 언어도 녹여내는 절묘한 균형 감각으로 어떤 주체도 소외시키지 않는 공간을 실현한다. 지난 10월, 그간의 시간을 집대성하는 전시가 열렸다. 방대한 답사 기록과 모형,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건축 작업이 한데 모인 장면은 건축가가 집에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자 일생의 고백과도 같았다. 전시는 45일 동안 1만 1천여 명이 관람하며 건축 전시로는 이례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건축가는 20회가 넘는 도슨트를 몸소 진행하며 그간의 작업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람객은 누군가의 동네를 담은 장면 앞에서 각자의 집과 인생을 떠올리기도 했다.
전시 제목인 에서 ‘픽션’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설계안을, ‘논픽션’은 실재하는 삶의 무대를 탐구하는 답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 시점에서의 정의다. 설계안은 시간이 흘러 지어지면 논픽션이 되고, 실재하던 도시는 매일 변화하며 어떤 장면은 픽션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픽션과 논픽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바뀌는 전환점에 구가도시건축이 있다. 삶에 주목하고, 집을 매개로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막연한 낙관을 동력 삼아 그 꿈을 실현해내는 건축가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전환점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없는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Architect Cho Jung-goo
Since founding Guga Urban Architecture, architect Cho Jung-goo has focused on the idea of architecture that is universal and close to everyday life. This approach unfolds through two parallel practices: walking the city and designing houses.
The 'Wednesday Walks', begun in November 2000, have continued for more than 1,100 sessions, documenting countless neighborhoods and homes. Insights gained through these walks inform his designs, while questions raised during design send him back into the city, shaping a reciprocal process that defines his work.
Rather than imposing theory on the city, Cho intervenes with restraint, connecting urban context with individual lives. His buildings blend naturally into their surroundings while remaining attentive to everyday living, achieving a balance that excludes no one.
Last October, an exhibition bringing together walk records, and completed works drew over 11,000 visitors in 45 days. Cho personally led more than 20 docent tours, inviting visitors to reflect on their own homes and lives through scenes of everyday neighborhoods. Titled , the exhibition captured the shifting boundary between unbuilt ideas and lived realities—an ongoing dialogue at the core of his architectural practice.
건축가 조정구
1966년 서울 보광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2000년 구가도시건축을 설립하고 ‘우리 삶과 가까운 건축’을 화두로 20여 년간 답사와 설계를 이어오고 있다. 답사를 통해 서울의 수많은 동네와 사람이 사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하고 기록해왔으며, 그 속에서 발견한 다양한 삶의 형상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집’을 찾는 작업을 실천하고 있다. guga.co.kr

필동 y주택 2024
60년 동안 거주한 집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주택. 건축주의 요구 사항은 하나였다. ‘붉은 벽돌의 예쁜 집’. 본래 집의 기억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주택을 설계하기 위해 애썼다. 집의 기억 위에 조금 더 따뜻하면서 내외부로 소통할 수 있는 밝은 공간을 지었다.

하동한옥문화관 2020
하동군 평사리 최참판댁 인근에 자리한 한옥 숙박 시설. 관리동은 전통 목구조와 중목구조를 결합해 기둥 바로 뒤로 하동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열린 입면을 구현했다. 관리동이 전통의 미감과 더불어 모던하고 투명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숙박동은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단층 한옥과 2층 규모 별채의 구성으로 한옥의 수평적 서사와 수직적 풍경을 함께 선사한다.

산남동 주택 2023
건축주는 대지 옆 오래된 회화나무가 마음에 들어 이곳을 구입했다. 항상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집을 바라던 그의 요청을 담아 목조 아치로 공간을 구성했다. 둥근 프레임 너머로 언제든 하늘과 가까운 자연을 올려다볼 수 있는 주택이다.

제주문학관 2021
제주에서 용천수가 솟아 나오던 ‘큰물’은 모진 자연으로부터 돌담을 쌓아 생의 원천인 물을 구하던 원형 공간인 동시에 마을의 공동체 공간이었다.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피어나던 문학의 시원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그 개념에서 문학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큰물을 형상화한 풍경 속에 자리한 모습을 떠올렸다. 숲으로 둘러싸인 대지에 네모난 건물이 놓이고, 둥근 담으로 둘러싸인 큰물 마당을 바라보는 장면을 구현했다.

fiction non fiction
구가도시건축의 25주년을 기념하며 열린 전시. 구가의 바탕인 ‘수요답사와 삶의 형상’, 구가가 만들어온 ‘마당집과 현대 한옥’, 구가가 추구해온 ‘새로운 삶의 형상을 찾아서’를 주제로 그간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주목받은 프로젝트는 ‘한남동 언덕 기록작업’이다. 그간 94회에 걸친 실측조사를 통해 한남동 언덕을 사진과 영상, 글, 도면으로 기록했다.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한남동 언덕의 동네와 집을 기억하기 위해 4m 길이의 모형을 그간의 기록과 함께 전시했다.
“화려하고 멋진 건축물보다 도시와 동네의 여러 모습을 수용하며 삶에 가까운 건축을 항상 짓고 싶었습니다.”
Q 구가도시건축의 25주년을 전시로 아름답게 기념했습니다. 개소 이후 꾸준히 도시 답사를 해왔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A 처음 사무소를 열었을 무렵에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이 수요답사였습니다. 일은 없고, 도시를 보는 건 좋아하니 답사라도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었죠. 도시는 누군가 일필휘지로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대응이 쌓여 지금의 꼴을 이루게 됩니다. 그 자생적인 모습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여러 동네를 관찰하면서 집과 길의 관계, 가게와 길의 관계, 마당을 삶의 중심에 두는 마당집 같은 생각을 쌓아나갔습니다. 도시 답사는 제 건축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아주 큰 영향을 줬어요.
Q 매주 직원들과 답사를 한다고요.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나요?
A 저는 사진을 찍고, 경로 기록자와 후기 작성자 이렇게 세 사람이 기본 구성원이 됩니다. 경로 기록자는 답사 루트를 도면과 범례로 정리하고, 후기 작성자는 제가 둘러보면서 이것저것 생각이 떠오르면 그걸 곁에서 기록합니다. 동네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도 해요. 세 사람의 기록을 모아 정리한 후에 이번 답사의 성격과 배운 점에 대해 짧은 총평을 쓰면 한 회차가 마무리됩니다.
Q 전시에서 도시 답사와 설계 프로젝트의 연표를 나란히 두고 서로의 관계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건축설계와 도시 답사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나요?
A 대구 임재양외과(<행복> 2013년 6월호)는 답사를 하며 얻은 ‘도시가 품고 있는 기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작업입니다. 병원과 주거 공간을 함께 설계하는 프로젝트였는데, 현장의 실측자료를 바탕으로 본래 있던 한옥과 일식 가옥의 모습을 일부 복원했어요. 도시의 기억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도록 한 거죠. 서촌 답사에서 본 마당 덮은 집은 몇 년 후 천연동 한옥(<행복> 2016년 5월호)의 마당 겸 거실 역할을 하는 아트리움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아트리움 위에 블라인드를 달아서 원하면 여닫는 식으로 햇볕을 조절하는 제 해석을 보탰어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계속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Q 구가도시건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바로 한옥입니다.
A 처음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북촌 마을 가꾸기’가 시작되던 시기라 한옥 프로젝트가 그나마 주어졌고, 꾸준히 설계하다 보니 한옥 건축가로 자리 잡게 되었죠. 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꼽는다면 한옥보다는 오히려 답사와 집이에요. 다만 한옥이 할 이야기가 많은 주제인 것은 맞습니다. 도시에서 모습, 전통에 대한 해석,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야 할지까지 고민할 지점이 많아요. 지금도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Q 최근 한옥에 대해 새롭게 느끼거나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면요.
A ‘한옥 같은 집’요. 사람들이 한옥 같은 집을 찾는 이유는 새로운 한옥을 원하기 때문이에요. 한옥 같은 집합 주택, 한옥처럼 보이지 않지만 한옥의 정체성을 지닌 하이브리드 한옥 등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Q 요즘에는 삶의 형상이 점점 더 빠르게 바뀝니다. 그 변화를 잘 담아내는 건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A 예전에는 집을 설계하면 30년 정도 흐른 후에 세대가 바뀌면서 고치는 정도였다면 요즘에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아요. 형태만이 아니라 용도도 달라집니다. 북촌 한옥이 대표적이죠. 팝업이나 스테이로 용도가 달라지고, 대상도 외국인으로 확장했어요. 매일의 변화에 맞춰 집 또한 유연해져야 해요. 도시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소멸과 생성이 굉장히 빠르게 일어나는데, 그 방식이 과연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요.
Q 한남동 도시 답사의 결과물이 그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형으로 제작한 지역 대부분이 재개발로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어요.
A 한남동을 다시 답사하면서 깨달은 점이 동네는 여러 시간의 층위가 겹쳐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었어요. 어떤 곳은 1960년대가 밀집해 있고, 어떤 곳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고르게 섞여 있어요. 서로 다른 시간이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헤테로크로니아라는 개념과도 닿아 있죠. 마치 박물관처럼요. 그런데 재개발은 이러한 시간을 한순간에 지워버립니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중학교 3학년 때 기억을 날리는 식으로 그 시기를 없애버리는 거죠.
Q 그렇다면 지금의 도시에서 동네는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요?
A 예전에는 동네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 김장을 하고 잔치를 벌이며 함께하던 공동체의 기억이었다면, 이제는 ‘공용체’의 기억이 될 것 같아요. 꼭 같이 모여서 기억하지 않아도 동네의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가회동에 사는 사람이 거의 없고 열에 아홉은 외국인이더라도, 서로 관계없는 아홉 명이 북촌을 각자 경험하고 좋은 동네로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분명한 건 내가 내 집에서 살아보고, 남이 살 집을 설계하면서 계속 깨우쳐가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라는 인터뷰가 앞으로 건축가 조정구의 방향성도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다음 10년, 20년은 어땠으면 하나요?
A 시대가 빠르게 바뀔수록 그 변화를 잘 흡수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발달한 기술을 통해 인간적인 것을 오히려 더 잘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현대 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전통 건축을 기록하고 더 잘 보존할 수 있고, 디지털과 가공 기술로 인해 도시와 건축 모형도 훨씬 크고 정교하며 빠르게 만들 수 있게 되었죠. 그 기술을 잘 쓰면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게 우리의 지혜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