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한국 꽃꽂이 작가로 활동하는 권화사 오흥경 대표의 한옥 호경재가 북촌에 문을 열었다. 한국 꽃꽂이를 가르치는 공방과 가족의 세컨드 하우스를 겸하는 이곳은 세 개의 채로 둘러싸인 마당과 22가지 전통 양식 창호, 새와 고양이가 쉬어 가는 정원까지 한옥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으로 가득하다.
별채에서 한국 꽃꽂이를 시연 중인 오흥경 대표. 안팎으로 통창과 한식 창호를 설치해 탁 트인 밝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별채는 가족이 손님을 초대해 식사하거나 모임을 여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북촌 한옥마을, 메인 거리에서 살짝 벗어나 한층 가팔라진 경사만큼 한적해진 골목에 ㄱ자형 안채와 사랑채, ㅡ자형 별채, 그리고 이들 채가 만드는 아름다운 정원을 품은 한옥, 호경재가 자리한다. 낮은 계단과 좁은 돌길을 지나 탁 트인 마당, 그리고 세 개의 채에 이르기까지 한옥의 완벽한 시퀀스를 보여주는 이곳은 한국 꽃꽂이를 배우려는 이들이 함께 어울리며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흥경 대표가 마련한 장소다. 그는 여기에 부부의 이름에서 마지막 한 글자씩 따와 호경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2006년부터 한국 꽃꽂이를 배웠어요. 중간에 해외에 살면서 멈췄다가 2013년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10년이 훌쩍 지나 이곳을 열기에 이르렀지요. 단순히 수업만 하는 곳이 아니라 한국 꽃꽂이와 같은 뿌리를 지닌 장소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간을 누리고 이 분야가 알려지는 발판이 되었으면 해서 한옥을 택했습니다.”
별채에서 내다보이는 마당과 사랑채 풍경. 마당은 물소리, 새소리가 흐르는 호경재의 메인 스폿이다.
오흥경 대표는 자신이 원하던 조건을 바탕으로 1년 넘게 한옥을 찾았다. ‘정원과 마당이 있을 것, 그리고 한국꽃꽂이를 하는 곳인 만큼 한국적 느낌이 물씬 드러날 것.’ “북촌에서 한옥을 찾다 보니 ㄷ자형이나 ㄱ자형 채 하나로 되어 있는 집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마저도 겉으로 보기에는 한옥이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면 생활하면서 덧대고 고쳐 본모습을 잃은 것이 많았고요. 이곳은 채의 배치나 정원의 풍경이 제가 상상하던 모습과 잘 맞았어요. 높은 대지에 위치해 햇빛이 잘 드는 것도 좋았습니다.” 1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마침내 한옥을 구입하고 호경재 프로젝트의 막이 올랐다. 그는 포도밭이 있는 기와집이었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 집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좋았던 한옥의 장면을 하나씩 소환했고, 거기에 한국적인 공간과 양식을 더해 집의 곳곳에 구현했다. 이 기나긴 여정을 함께한 이는 대학원에서 같이 건축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연을 맺어온 인룸더디자인 권루이 실장. 그는 프로젝트를 맡을 당시의 소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테리어 일을 오랫동안 했지만, 한옥은 처음이었어요. 고민을 많이 하다가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 승낙했지요. 시행착오를 겪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어려울 줄은 몰랐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건 끝나고 나서도 끝이 나지 않았어요.(웃음) 지금도 고칠 부분이 생기거든요.”
왼쪽 안채의 침실. 좀 더 편하게 머무를 수 있도록 대청마루가 있던 곳을 터서 방을 넓혔다. 오른쪽 사랑채의 응접실. 한식 창호는 구조체와 최대한 어울리는 색감으로 제작했다.
이곳은 1930년대에 지은 한옥을 한 차례 고즈넉하게 고친 집이었는데, 오랫동안 임대 스튜디오로 쓰면서 본모습을 많이 잃은 상태였다. 가장 먼저 돌입한 작업은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묵은때를 벗겨내고 각각의 부재가 품고 있던 본래의 색을 찾아주는 것. 부재는 하나하나 샌딩하고 오일 스테인을 발라 원래의 색감을 복원했고, 그다음에는 마당을 향하는 벽면 곳곳에 통창을 설치했다. 덕분에 채와 마당이 서로 빛을 들이고 비추며 어둡던 첫인상은 밝고 열린 공간감으로 탈바꿈했다. 모든 채를 향해 열린 마당은 때로 공연을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한다.
한국 꽃꽂이의 재료로 사용하는 화기를 보관하는 수납장.
다행히 채의 배치는 오흥경 대표가 생각한 것과 구성이 딱 맞았다. 265㎡의 대지에 100㎡ 규모의 한옥은 누군가는 땅의 면적에 비해 공간이 작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채의 분리와 적절한 외부 공간이 더 중요했다. ㄱ자형 사랑채는 수강생들이 수업을 듣는 공간과 사무실, 응접실이 됐고, 안채는 가족이 가끔 쉬어 가거나 외국 손님이 머무는 세컨드 하우스, 별채는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하거나 모임을 여는 장소로 본래의 용도를 이어받았다.
별채와 안채, 사랑채로 둘러싸인 마당. 독특한 채의 배치는 흔히 보기 어려운 한옥의 풍경과 아름다운 마당을 만들어냈다.
오흥경 대표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한옥에서 발견한 한국성을 곳곳에 심는 것.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 바로 창호와 마당이다. “단순히 기와나 구조의 형태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의 디테일은 무엇이 있는지, 왜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좀 더 고민해보는 거예요. 이번에 한옥을 오래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이 양식이 굉장히 인간적이라는 것이었어요.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고 경계가 모호한데, 그러면서도 나름의 법칙을 지니고 있었죠. 그런 부분을 꽃꽂이에도, 공간에도 표현하려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당은 바닥에 가공한 석판을 까는 대신 납작한 형태의 돌을 찾아 심는 수고를 더했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의 냇가를 거닐던 기억에서 출발한 연못은 정원의 필수 요소로 삼아 조성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꾼 정원은 봄에는 팥꽃나무의 보라색 꽃으로, 여름에는 배롱나무의 진분홍색 꽃으로 아름답게 물든다. 그 정점에 있는 22가지 문양의 창호는 권루이 실장이 수많은 한옥을 답사하고 자료를 조사하며 탐구한 결과다.
오흥경 대표가 10년 넘게 수집한 오브제와 한국 꽃꽂이 작품은 호경재를 더욱 빛내주는 존재다.
전통과 현대가 녹아든 호경재는 오흥경 대표의 바람대로 작년 9월 문을 연 후, 한국 꽃꽂이를 알리는 장소로 제 쓸모를 톡톡히 하고 있다. 오는 10월 열릴 행복작당에서도 공개해 사람들을 맞이할 예정. “누군가 호경재라는 이름에 넓을 호浩, 경사 경慶이라고 ‘좋은 일이 널리 퍼지게 하는 집’이라는 뜻을 붙여줬는데, 그 의미가 정말 좋았어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 집에서 느끼던 감상이 이 집에 녹아든 것처럼 여기에 오신 분들도 나중에 ‘한옥이 이랬지’ 하면서 추억하고 참고하는 곳이 되길 기대하면서 만든 장소예요. 이곳에서 사람들이 정원도 바라보고 땅 내음도 맡으면서 꽃꽂이에 몰두하며 힘든 것을 거두고 갔으면 합니다.”
디자이너 권루이는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1세대 인테리어 디자이너 故 손석진의 핸디와 엄지하우스에서 일했다. 삼성전자 서초 본사, 제주 핀크스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제주 방주교회 등에 참여했다. 2014년 인룸더디자인을 개소한 이후 특정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다양한 공간을 작업하며 디자인의 범주를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