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디자인20세기 초 남성 지배적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 이상으로 커다란 성취를 거둔 여성 디자이너의 궤적을 되짚어본다.
요즘은 어딜 가나 여성 디자이너가 남성 디자이너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20세기 초 여성은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 디자인 역시 남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었다. 대단히 진보적인 건축디자인 학교인 독일의 바우하우스조차 여학생이 너무 많이 입학하는 것을 우려했고, 여학생은 무조건 텍스타일을 전공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시절이니 20세기 전반기에 여성이 디자이너로 성공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가운데 아일린 그레이, 릴리 라이히, 마르가레테 쉬테-리호츠키, 마리아네 브란트, 샤를로트 페리앙, 레이 임스 등 이름을 남긴 여성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남성이 텃세를 부리는 건축과 디자인판에서 성취를 이루는 데 높은 장벽을 넘어야 했고, 자신의 업적이 폄하되기도 했다. 또 어떤 여성은 동료인 남성 디자이너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익명으로 협조하기도 했다.
20세기 전반기에 가장 성공한 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중 한 명은 아일린 그레이(1878~1976)다. 그녀의 나이를 보면 유럽의 급진적 모더니스트들인 발터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지에, 미 반데어로에 등 남성 디자이너들보다 약 10년 이상 먼저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 장식미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고, 장식미술가로서 완숙한 경지에 오른 뒤 모더니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런 위치 때문인지 다른 여성 모더니스트들이 남성과 협력하며 명성을 쌓은 것과 달리 아일린 그레이는 늘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기계적이고 차가운 모더니즘보다는 좀 더 고급스럽고 우아하며 공예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레이는 부자 고객을 위해 값비싼 재료를 사용해 아주 사치스러운 18세기 스타일의 장식미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에 모던 건축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경험한 뒤 과감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바꿨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산업적이고 기능적인 가구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E1027 테이블은 크롬 도금한 강철관을 프레임으로 사용한 대단히 간결한 디자인으로, 바우하우스의 강철관 의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더니즘의 기계주의 미학을 잘 구현해낸 작품이다. 이 테이블은 그녀가 처음으로 설계한 건축물인 E1027 주택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바닷가 바로 옆에 지은 이 건물은 대담한 모더니스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모더니즘의 건축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르코르뷔지에는 “여성이 이토록 완벽하게 자기 스타일의 건축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고 할 정도였다. 자기보다 어린, 하지만 모던 건축계 거장의 이런 발언에 그레이는 불쾌감을 느꼈다.
르코르뷔지에를 비롯해 많은 모던 건축가가 여성 디자이너와 협업을 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여성 디자이너와 협업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디자인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독일의 릴리 라이히(1885~1947)는 1920년대 중반부터 미스 반데어로에의 긴밀한 파트너로 미스가 미국으로 떠나가기 전까지 함께 작업했다. 그 가운데 미스의 가장 유명한 의자로 손꼽히는 바르셀로나 의자와 브르노 의자, 그리고 미스의 1920년대 걸작인 바르셀로나 전시회의 독일관은 릴리 라이히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하지만 이들 디자 인의 바이라인에 ‘릴리 라이히’라는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릴리 라이히는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대부분의 여성 디자이너처럼 그들에게 허용된 텍스타일 분야에서 일을 시작했다. 바우하우스와 함께 독일 모더니즘을 이끈 독일공작연맹에서 그녀는 전시 기획 업무를 책임졌고, 1920년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이사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레이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것과 달리 릴리 라이히는 그야말로 독립적인 디자이너로 미스와 협력했다. 흥미로운 점은 미스가 미국으로 떠난 뒤 더 이상 라이히와 작업할 수 없게 되자 가구 디자인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스 역시 라이히의 재능을 높이 산 것이 틀림없다. 그가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이 되었을 때 라이히도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치가 집권한 뒤 미스는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제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재난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세계적 건축가로 성장했다. 반면 독일에 남은 라이히는 자신의 스튜디오가 폭격당했고, 나치의 탄압을 받아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성 디자이너라는 이유로 그녀의 노력과 성취는 제대로 평가받지못했다.
샤를로트 페리앙(1903~1999)은 릴리 라이히만큼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건축가로서 주류 세계로 들어가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쳤다. 그녀는 르코르뷔지에가 지은 유명한 모던 건축 이론서인 <건축을 향하여>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작업실을 찾아간다. 이때 르코르뷔지에는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 “우리 사무실에서는 쿠션에 장식하는 일이 필요 없습니다.” 페리앙을 자신이 경멸하는 장식미술가로 생각한 것이다. 그녀의 모던한 작품을 본 뒤 르코르뷔지에는 페리앙을 직원으로 받아들인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페리앙은 르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인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LC로 시작하는 일련의 의자들을 디자인한다. 이 의자들은 바우하우스 의자들과 함께 초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이 의자들을 보면 페리앙의 영향력이 분명히 작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강철관 의자와 달리 LC 시리즈 의자는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으로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LC4 셰즈 롱그의 모델이 되기도 했는데, 셰즈 롱그에 관능적으로 누운 19세기 여성 인물화와 달리 얼굴을 돌림으로써 광고사진을 보는 독자가 의자에 누운 여성이 아닌, 의자의 형태와 기능성에 집중하도록 했다. 르코르뷔지에 역시 샤를로트 페리앙과 협업을 끝낸 뒤에는 더 이상 의자를 디자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 프루베와도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장 프루베가 디자인한 책장에 대해서 페리앙은 자신의 공헌을 주장하지만, 프루베의 유족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찰스 임스는 전후 미국의 모더니즘을 이끈 거장으로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였다. 가구 디자인 분야에서 유럽에 열등감을 갖고 있던 미국이 그의 등장으로 완전히 자존심을 회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현대미술관이 1946년에 그를 단독으로 조명한 전시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전시 제목인 <찰스 임스가 디자인한 새로운 가구(New Furniture Designed by Charles Eames)> 또한 남성 권위주의 시대를 반영한다. 임스 가구는 찰스와 그의 부인 레이 임스(1912~1988)의 공동 작업이다. 찰스는 재료와 기술적 부분에 집중하고, 레이는 조형적이고 미학적 부분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니 전시회 제목에 한 사람의 이름을 뺐다는 건 명백한 남녀 차별이다. 그녀가 이름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 찰스 임스 가구가 아닌 찰스와 레이 임스 가구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여성 디자이너들은 그나마 이름이 많이 알려진 편이다. 매리언 마호니 그리핀 (1871~1961)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명한 건축 드로잉 작품집 <바스무스 포트폴리오>의 작업을 함께 하며 수많은 건축 드로잉을 직접 했지만,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네덜란드 건축가 헤릿 릿트벨트가 1925년에 디자인한 슈뢰더 하우스는 초기 모던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 주택의 많은 아이디어는 건축주인 슈뢰더 부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20세기 전반기에 여성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은 높은 성차별의 장벽을 느끼며 자신의 길을 가야 했다. 남성 아방가르드들은 역사주의라는 고정관념에 맞서 투쟁하며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다. 반면, 여성 모더니스트들은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 성적 고정관념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글 김신 김신은 26년 동안 디자인 관련 글을 써온 칼럼니스트다.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총 1백99권의 잡지를 만들었다. 이후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거쳐 2014년부터 프리랜스 칼럼니스트로 여러 신문과 잡지, 온라인 미디어에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레이 임스
20세기 가구 제조 기술의 혁신을 이룬 레이 임스는 바로 이 기능주의 정신이 녹아든 공간에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했을지도 모른다. 합판을 곡선으로 구부리는 성형 합판 기술, 몸체와 팔걸이를 일체형으로 만든 유리섬유 셸, 긴 철사를 이용해 유연한 철망 프레임 등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혁신적 기술력이여기 있는 모든 가구에 적용되었다.
엥겔포이즈의 데스크 조명등 Type75는 에이후스, 책상 위 책 모양의 조명등은 더콘란샵(02-2118-2516) 판매.
1 유기적 뼈대 형태로 디자인한 LCM 의자
2 견고한 철제 프레임과 원목 패널로 구성한 데스크 유닛
3 새 모양 오브제
4 안락한 라운지체어&오토만
5 성형 합판으로 제작한 코끼리 모양 스툴
6 직선과 사선으로 교차하는 철 제 다리가 돋보이는 LTR 테이블
7 등받이·좌판·다리·중심축을 따로 제작한 후 탄성고무로 연결한 LCW 의자는 모두 비트라 제품으로 에이후스(02-3785-0860) 판매.
아일린 그레이
모더니즘의 간결함과 아르데코의 우아함을 절묘하게 결합한 그의 가구는 좁은 코너에서도 독보적 오라를 뿜어낸다. 예술 사상은 물론 타문화, 타인에 대한 수용과 이해가 뒷받침되어 정형성에서 탈피한 독창적 디자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옻칠공예부터 가구 디자인, 건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 다재다능한 예술가의 공간이다.
사이드 테이블 위 검은색 저그와 컵은 에이치픽스(02-3461-0172) 판매.
1 금속 베이스에 굽은 관 모양의 얇은 강철 기둥으로 구성한 로아티노 플로어 조명등
2 높이 조절이 가능한 사이드 테이블 E1027은 20세기 디자인 아이콘이 되었다.
3 미쉐린의 비벤덤 캐릭터에서 이름을 따온 볼륨감 있는 비벤덤 암체어는 모두 클래시콘 제품으로 인엔(02-3446-5103) 판매.
샤를로트 페리앙
철제, 알루미늄, 유리 등 새로운 소재에 대한 탐구욕이 강하던 그의 도회적 공간. 르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디자인한 20세기 아이콘, LC 시리즈는 특히 강철관 튜브를 열렬히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물이다. 르코르뷔지에 스튜디오에서 독립한 이후에는 일본과 베트남에서 활동하며 나무, 케인 같은 소박한 재료를 사용해 독자적 디자인을 선보였다.
빈티지 패턴의 원형 러그와 사각 카펫은 LOLOI 제품으로 에이치픽스 판매.
1 정육면체를 이루는 엄격한 구조미가 특징인 LC2 암체어
2 정교한 철제 프레임과 멋스러운 가죽이 만난 LC1 암체어는 카시나 제품으로 더콘란샵 판매.
3 다리가 세 개 달린 타부레 베르제 스툴
4 일본의 오리가미 전통에서 차용한 디자인의 옴브라 도쿄 의자
5 다양한 각도로 포갠 상판과 세 개 다리로 구성한 벤타글리오 테이블은 모두 카시나 제품으로 크리에이티브랩(02-516-1743) 판매.
릴리 라이히
미스 반데어로에의 숨은 조력자를 넘어 파트너로서 공동 설계자의 위치에서 재조명받는 그의 세련미 넘치는 공간이다. 1931년 디자인한 강철관 튜브 구조의 캔틸레버 의자 LR120을 비롯해 강철 튜브와 나무의 결합을 보여준 LR500 테이블 등 라이히의 디자인은 바르셀로나 컬렉션이 탄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기하학 패턴의 러그는 나니마르키나 제품으로 더콘란샵,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플로어 조명등은 에이후스, 물푸레나무와 라탄으로 제작한 케인 파티션은 에이치픽스 판매.
1 섬세한 가죽 마감과 마호가니 원목 프레임에 스틸 다리로 구성한 바르셀로나 데이베드
2 고대 이집트의 귀족 의 자에서 영감을 받은 X자 모양의 베이스가 특징인 바르셀로나 체어와 스툴은 모두 놀 제품으로 더콘란샵 판매.
3 깨끗한 곡선과 옆면이 돋보이는 브르노 의자
4 크롬 다리와 유리 상판이 결합한 바르셀로나 테이블은 모두 놀 제품.
5 캔틸레버 형태의 D42 암체어는 텍타 제품으로 에이치픽스 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