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가 직접 고쳐서 사는 집은 어떤 모습일까? 아르케708 고영빈 소장의 104㎡ 아파트는 구축 아파트라는 한계 안에서 꿈꾸던 모든 바람을 실현한 공간이다.
부부의 다양한 취향이 담긴 거실. 이야기가 풍성한 공간을 만들고자 벽에 텔레비전 대신 그림을 걸었다. 언제든 그림을 바꾸고 추가할 수 있게 양쪽 벽에 액자 레일을 설치했으며, 다양한 앉는 공간을 배치해 여러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신혼집만큼 꿈과 이상이 가득 담긴 집이 있을까. 특히 공간 디자이너에게 내 공간이란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온전히 구현해볼 수 있는 순간이자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고영빈 소장도 2022년 김남현 씨와 달콤한 신혼 생활을 시작하며 집은 반드시 스스로 꾸미겠다 마음먹었다. 두 사람의 신혼집은 1993년 지은 구축 아파트로 전형적인 스리룸 투 베이 연출구조였다. 거실과 안방이 전면 발코니를 면한 투 베이 구조는 남은 두 방의 직접 채광이 어려운 데다 공용 공간 사이의 연결성이 낮아 최근에는 스리 베이, 포 베이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긴 시간 아파트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본 구조이기도 하다. 고영빈 소장도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같은 구조의 집에서 살던 적이 있었고 클라이언트를 통한 간접적인 경험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눈에 지금 집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가능성이 엿보였다고 한다. 같은 구조의 아파트보다는 공용 공간이 넉넉했으며 주방과 작은 방이 길게 빠진 평면은 흥미롭기까지 했다.
“사실 외관을 봤을 때는 심드렁했어요. 첫 집이었던 데다 비용도 계획보다 더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라 고민을 정말 많이 했지만, 저희가 원하는 모습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제 확신을 믿어보기로 했죠.”
화이트 톤 주방에는 아치와 컬러로 포인트를 주었다. 전면의 작은 창 윗부분에 아치형 가벽을 덧댔으며 중앙의 원형 팬던트 조명과 유리에 붙인 반투명한 패턴 시트지가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노란색 원형 테이블로 포인트를 주었다.
자연과 이야기로 귀결되는 부부의 취향
전면 리모델링을 시작하며 원한 내용은 확실했다. 언젠가 조그마한 정원이 있는 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공유해온 만큼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을 볼 수 있는 풍경을 원했고, 그 안에서 정돈된 휴식을 즐기길 바랐다. 첫 번째 조건은 이 집을 선택한 이유기도 하다.
“저와 아내가 생각한 구축 아파트의 최대 장점은 뷰입니다.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켜온 조경이 세월과 함께 무르익어 실내에서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거든요. 특히 이곳은 건너편에 학교가 있어 거실 창으로 빨간 벽돌 벽 위로 초록 잎사귀가 산들거려 주택에 사는 듯한 착각까지 느껴진답니다.” 창밖의 아름다운 자연은 실내까지 이어진다. 안방 발코니에 얕은 식물용 욕조를 만든 것. 높은 화단 형태의 식물 욕조에는 키우는 화분을 모아두었으며, 욕조 부분은 흙과 비슷한 색 타일로, 욕조 바깥은 콩자갈로 마감해 야외 정원처럼 연출했다. 거실에도 창 앞에 낮은 화분을 두고 1800년대 스타일의 식물 일러스트를 베란다 문 옆으로 건 걸었다. 덕분에 창밖의 자연이 실내 공간으로 스며든 듯한 풍경이 완성됐다.
왼쪽 안방 침실. 창 너머 보이는 식물은 부부가 꿈꾸던 주택살이를 상상하게 한다. 천장 간접등 박스와 낮은 침대 헤드에 매립한 간접 조명이 아늑함을 더한다. 오른쪽 현관 바로 앞에 거실 화장실이 있어 문에 특별히 신경 썼다. 화장실 문이 아닌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이도록 현관과 같은 패턴의 우드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한 것. 천장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 아트월 분위기를 풍긴다
두 식구, 단출한 가족 구성이지만 공간 곳곳에 앉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마련한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가장 두드러진 곳은 단연 거실. 커다란 테이블로 중심을 잡고 사이드 체어부터 소파까지 서로 다른 형태와, 착석감을 가진 좌석으로 빈 공간을 채웠다. “아파트, 특히 구축 아파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각 영역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공간에 사용자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으려면 그 경계가 옅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방 가까이 넓은 라운지 체어와 조명을 두었죠. 아내가 요리를 할 때도 같이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요. 거실은 가구의 종류만큼 더 다채로운 장면이 만들어져요. 각각 테이블과 소파에서 개인 시간을 갖거나 초대한 손님과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식이죠.”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위해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왼쪽 원래 서재에 있던 우드 테이블을 최근 안방으로 옮겼다. 문 오른쪽이 드레스룸 겸 파우더룸이다. 오른쪽 중문과 중문 설치용 벽을 만들어 방풍 및 방음을 강화했다. 하부는 막고 상부는 유리로 시야를 열어 잡동사니는 가리고 개방감은 살렸다.
고영빈 소장이 세심하게 계획한 자연의 동선. 창밖에서 식물 욕조의 화분을 거쳐 거실의 회화까지 단계적으로 이어진다.
탁 트인 공간을 좋아하는 김남현 씨가 거실 테이블에서 혼자만의 취미를 즐기는 동안 고영빈 소장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거나, 부부가 제일 좋아하는 배치인 90도로 마주 보는 소파에 기대앉아 서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처럼 말이다. 거실에 텔레비전 대신 그림을 건 것도 함께 이야기 나눌 분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빈티지 스타일이 요즘은 ‘힙’한 스타일이기도 하잖아요. 신기하게 양가 부모님 모두 물건을 소중히 쓰셔서 둘 다 옛것 특유의 분위기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에요. 특히 회화를요. 아버지는 취미로 수묵채색화를 그리셨고, 장인어른은 민화를 비롯한 각국의 그림을 참 좋아하세요. 지금도 여행지에 가면 길거리 화가의 그림이라도 한 점 사 오실 정도니까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것들이 이제는 저희의 취향이 되어 자연스럽게 집에도 드러난 셈이죠.”
매력적인 긴 벽에 포인트를 준 서재. 훗날 자녀 방으로 활용할 수 있게 큰 창 하부에 벽을 세우고 침대 높이에 맞춰 책장을 넣었다.
결혼을 한 지도, 인테리어를 한 지도 2년 반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집은 부부의 모습을 닮아 참 많은 것을 담아내며 더욱 익숙한 공간이 되었다. “최근에 서재와 안방을 비롯해 구조를 조금씩 매만졌어요. 낯익을 때쯤 조금씩 변화를 준 거죠. 거실도 새로운 배치를 고민하고 있어요. ‘테이블을 돌려 세로축을 강조할까?’ ‘창밖 풍경을 만끽하게 베란다 앞에 테이블을 붙일까?’ 하며 말이에요.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서재가 아이 방으로, 식물 욕조가 아이의 물놀이 공간으로 또 바뀌겠죠?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이 집에서 살아갈 앞으로의 나날이 더 기대돼요.” ― 기사 전문은 <행복> 9월호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고영빈 소장은 학부와 석사 모두 건축을 전공했으며 다년간에 걸친 건축 공부는 건축사사무소의 실무 경험으로 이어졌다. 2016년부터, 대학원 선배 차재경 실장과 아르케708을 설립, 건축, 인테리어, 가구 등 공간의 모든 요소를 디자인하고,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거창함보다는 본질에 집중하고, 더 나아가 사용자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teamarche708.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