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면 나무에 피어난 꽃이, 겨울이면 언덕을 뒤덮은 설화雪花에 반사된 달빛이 유리창을 적시며 사계절을 감각하게 하는 이혜인 씨의 집. 그러나 이 집에서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계절의 순환만이 아니다.
집에 있을 때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거실과 이어지는 주방. 원래 요리를 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뷰 덕분에 요리를 하기시작했다고.
스리랑카에 살면서 모아온 코끼리 모티프 아이템과 잡동사니들을 옷방 서랍장 위에 두었다. 손톱만한 알루미늄 코끼리 오브제, 패브릭 코끼리 아이템 등 다양한 오브제 안에는 여러 추억이 깃들어 있다.
사람은 집의 모습을 바꾸고, 집은 사는 이의 삶을 변화시킨다. 집과 사람, 둘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은 서로를 날마다 새롭게 만든다. 로우클래식 본점 레노베이션, 우영미 파리 생토노레 플래그십 스토어 인테리어, 인플루언서 수사샤의 집 인테리어 등을 진행한 공간 디렉터 이혜인 씨의 연희동 집은 이러한 명제가 참이라는 걸 보여준다. 이혜인 씨가 지금의 집을 만난 건 약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살던 집의 계약 종료일이 다가오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시작했죠. 회사 점심시간까지 활용해 마흔 군데 넘게 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침대에 누워 온라인 부동산 플랫폼을 살피다 이 집의 거실 창문 뷰 사진을 본 거예요. 부리나케 문자를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계약했어요.” 나무와 풀이 우거진 둔덕이 창틀을 액자 삼아 풍경화처럼 걸린 거실 조망. 이를 마다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싶지만, 어지간한 집으로는 꿈쩍도 안 하던 그의 마음에 불꽃이 튄 건 초등학생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스리랑카에서 보내며 몸에 스민 감각 때문이었다.
현재 집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로 작용한 거실의 커다란 창. 우거진 나무와 풀이 내다보인다.
침대와 소파는 비뚜름하게 두었는데, 오와 열을 맞추려는 대칭 강박을 탈피하려는 시도라고. 침실은 침대와 작은 테이블, 화분만 두어 심플하게 꾸몄다.
“그곳에서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당연했어요. 서울에 온 뒤로 마음 한쪽에 늘 자연과 함께하고픈 욕망이 있었죠.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엔 키우는 화분의 수만 30여 개에 달했을 정도예요. 그러나 지금 집의 커다란 창과 이를 통해 내다보이는 자연 덕에 갈망이 많이 해소되었어요.” DNA처럼 새겨진 옛 추억이 만든 기호는 집 곳곳에 묻어난다. 예를 들면 스리랑카는 더운 기후의 특성상 나무 가구와 아웃도어용 철제 가구가 발달했는데, 어린 시절 이것들을 보고 만지던 기억은 지금의 선택에도 영향을 끼친다. 틀로 찍어낸 듯 정형적인 형태보다 손맛이 느껴지는 핸드크래프트 제품을 선호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러한 취향의 발현은 집 안 곳곳에 놓인 코끼리 모티프 아이템에서 정수를 이룬다. “제게 코끼리는 굉장히 친숙한 동물이에요. 그래서인지 관련 아이템을 눈앞에 두면 안정감이 느껴져요. 코끼리 오브제, 쿠션, 스티커 등 가리지 않고 꾸준히 모으며 늘 시선이 닿는 곳에 두죠.” 이혜인 씨의 손길을 거쳐 이국적인 느낌을 머금게 된 이 집은 최근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8개월 전 반려견 ‘버드’를 입양하며 공간에 머무는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난 것. 버드의 이동 동선을 고려해 거실 바닥에 듬성듬성 배치해놓은 식물을 한쪽으로 모으고, 버드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러그를 곳곳에 깔면서 한층 다채로워졌다. 물론 집이 이혜인 씨의 삶에 미친 영향도 있다. “과거 집을 구할 때 원칙 중 하나는 ‘현관에서 주방이 보이지 말 것’이었어요. 요리를 전혀 하지 않았거든요. 주방 수납장도 옷 캐비닛처럼 사용했어요. 그러나 요즘엔 요리를 자주 해요. 지금 집이 부엌 전망도 훌륭한데, 부엌 창 너머의 풍경을 보려 하니 자연스럽게 생활 패턴도 변하더라고요.”
1 스리캉카에서 구입한 시멘트 트레이 위에 둔 장식용 말린 시망고(Cerbera manghas) 열매. 어머니가 집에 수북이 쌓아 놓은 걸 몇개 가져왔다.
2 스리랑카에서 산 원석을 깎아 만든 코끼리 모티프 함.
3 노매드적 삶을 꿈꾸던 이혜인 씨가 언젠가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만든 주인공인 반려견 버드.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싶은 이 집에서 이혜인 씨가 가장 많이 하는 건 역시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풍경 감상하기, 그리고 쉼 없이 청소하기다. “사전 질문지의 취미 항목을 두고 한참 고민할 때, 친구가 옆에서 말하더라고요. ‘빨래하기라고 해’. 하하. 근데 저 정말 빨래와 청소에 진심이에요. 청소용품 관련해서는 얼리 어답터라니깐요.” 매일 쓸고 닦는 건 기본, 안 쓰는 물건은 미루지 않고 정리한다. “정기적으로 물건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얼마나 자주 쓰는지, 어떤 추억이 담겨 있는지 등을 생각해요. 그러고 나서 물리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쓸모를 다한 것은 과감하게 버리죠. 주기적으로 사물과 나의 관계를 곱씹다 보면, 집 안에 놓인 물건 각각의 좋아하는 이유가 점점 또렷해져요.” 이렇게 살아남은 물건들의 위치는 자주 바뀐다. 가구를 재배치하는 건 최소 한 달에 한 번꼴, 작은 오브제는 매일 다른 자리에 둔다고. “날마다 기분이 변하듯, 물건을 두고 싶은 위치도 그날그날 달라져요. ‘오늘은 여기에 두는 게 더 안정감 있어 보이네’ 하면서 옮기죠.” 지루함을 잘 느끼는 성향 탓이라며 웃었지만, 이혜인 씨는 고탑지근할지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안다.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 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걸.
1 스칸디나비안 디자이너들과 협업해 제품을 선보이던 1990년대 생산한 빈티지 이케아 플로어 램프.
2 선물로 받은 필로덴드론 플로리다뷰티 화분. 집에 오자마자 새로운 잎이 자라났다.
3 처음 ‘내돈내산’한 의자. 1980년대 생산한 쿠시+코Kusch+Co의 솔리 폴딩 체어다. 접었을 때 얇은 것이 마음에 든다.
4 스리랑카 외딴 지역을 여행하다 우연히 들어간 우드카빙 작업실에서 산 코끼리 오브제.
5 예전부터 좋아하던 브랜드이고, 우연한 기회에 함께 스튜디오를 나누어 쓰게 된 오브제 스튜디오 디 엠파시스트The Emphasist의 메탈 트레이. 도어 스토퍼로 사용 중이다.
6 모로코에서 구입한 가죽 푸프pouf. 현지에서는 계절 옷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이혜인 씨 역시 안 입는 옷을 넣어 사용한다.
7 태국에 다녀온 남자 친구가 사다 준 코끼리 오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