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이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목록집을 출간했다. 드문드문 만나는 작품으로 어렴풋이 그려볼 수밖에 없었던 이건희컬렉션의 실체와 맥락을 이제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이상범, ‘무릉도원’,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159×39(×2),159×41(×8)cm, 192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문화계 뉴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건희컬렉션이 몰고 온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건희컬렉션이 기증된 이후 처음 열렸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는 약 25만 명의 관람으로 막을 내렸다.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연장에 연장을 거듭해 총 11개월간 전시되었고, 미술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긴 줄이 이어졌다. 전시실의 너른 벽을 가득 채운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세월에 바래지 않는 정다움이 가득한 이중섭의 ‘다섯 아이와 끈’, 군마의 역동을 담은 김기창의 ‘군마도’까지, 그야말로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사에 잠들어 있던 보물들의 재발견이었다. 전시는 맥락과 주제를 달리해 <이중섭>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피카소 도예> 전시로 이어졌고 대전과 대구, 청주, 광주 등 전국 순회 전시도 펼쳐졌다.
이런 전시는 근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명작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것의 흥분과 떨림은 물론이요, 한 개인의 안목과 열정이 집약된 ‘아트 컬렉션’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무궁무진하다. 2021년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은 컬렉션 전시와 더불어 아카이빙과 연구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고 최근 그 의미 있는 결과물이 대중에 공개됐다. 전체 작품 1494점의 도판과 해제, 작품 목록 등을 담 은 900여 쪽의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목록집이 그것이다. 이 목록집은 국립현대미술관 도서실에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며, 미술관 누리집에서 PDF 파일로도 볼 수 있다. “유례없는 대량 기증 작품과 그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꾸준한 연구가 한국 근현대미술을 고증하는 중요한 기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의 말처럼 이 목록집은 미술을 사랑하는 대중은 물론, 한국의 근현대미술을 연구하는 미술계 관계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목록집
목록집 서두에는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 연구관, 홍선표 이화여대 명예교수, 김인혜 미술사가 등의 글을 실었고, 그 뒤로 방대한 작품의 도판이 이어진다. 컬렉션의 주요 작가로 알려진 이상범의 대작 ‘무릉도원 10폭 병풍’(1922)을 비롯한 수묵화, 서양의 유화 기법을 받아들인 이제창의 ‘독서하는 여인’(1937), 박래현의 ‘여인’(1942), ‘노점’(1956) 등이 눈을 사로잡는다. 구성에 독특한 점이 있다면, 작가의 생년순으로 작품을 순서에 따라 소개해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 한국 근대미술의 출발에 깊이 배어 있던 동양화적 요소부터, 서양화의 양식을 받아들여 본격화된 유화와 판화, 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러 꽃피기 시작한 추상화와 단색화까지, 100여 년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주요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번 목록집을 살피며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수확은 한국 미술에서 적잖이 소외되었던 ‘근대’라는 시간에 집중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백남순, 김은호, 김인승, 이인성, 구본웅 등 1890년대부터 1930년대 이전까지 태어난 작가들의 작품이 전체 컬렉션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여전히 미지에 가깝게 느껴지는 그 시대의 공기와 우리 미술사의 전환을 이끈 중요 작품들을 찬찬히 음미해보기 바란다.
이제창, ‘독서하는 여인’, 패널에 유화물감, 33×24cm, 1937,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 연구관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목록집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이었나. 제작 과정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이건희컬렉션처럼 수집가로부터 기증을 받는 경우에는 작품의 저작권자인 작가나 유족에게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었음을 알리고, 또 작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인받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건희컬렉션은 수집 기간과 규모에 비해 굉장히 관리가 잘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발표 때와 다른 제목이 붙어 있거나 제작 연도 등의 정보에 오류가 있는 경우가 있어 이를 가능한 한 정확히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방대한 작품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목차와 부록 등을 구성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예를 들면 본문의 도판에서는 작가를 생년순으로 소개하지만, 부록의 작품 해제에서는 가나다순으로 정리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건희컬렉션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어본다면?
작품 한 점 한 점도 중요하지만, 기증 자체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과 파급효과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단, 기증에 대한 긍정적 인식 변화를 들 수 있다. 이건희컬렉션 이후, 기증 의사를 밝히는 수집가나 작가, 유족이 현저히 많아졌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미술관 같은 공적 기관에 들어가면 전문적인 관리 속에서 훨씬 더 많은 관람자를 만나고, 연구자들의 관심도 받게 된다. 예술로서뿐만 아니라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 또,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미술관에 소장되면, 그 작품과의 연계 선상에서 같이 전시할 만한 다른 작품들을 추가로 구입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이후의 수집 방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기적으로는 미술관 소장품의 구성이 상당히 밀도 있게 향상될 것이다.
2024년에 예정되어 있는 이건희컬렉션 관련 전시를 소개해 달라.
봄에는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가을에는 전주도립미술관에서 이건희컬렉션 순회전이 열릴 예정이다. 2025년 말부터 2027년 초까지 국립중앙박물관과 공동 주최로 해외 순회전도 계획되어 있다. 미국의 국립아시아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그리고 대영박물관에서 개최된다.
목록집을 이용할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국내 작가들을 소개한 1부의 도판은 작가 생년순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1850년생인 채용신에서 시작해 1975년생인 백지혜로 끝난다. 수집품에 어떤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흐름을 부분적으로나마 반영하도록 의도한 구성이다. 도판을 순서대로 감상하면서 전통 회화의 계승,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서양미술 사조의 유입이라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 화가들이 어떤 고민과 선택을 했을지 상상하며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COOPERATION 국립현대미술관(mmc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