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가 11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어느덧 환갑을 넘긴 이 노장 디자이너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비관론에 사로잡힌 이 시대에 유쾌한 일침을 가한다.
전시 포스터. 물고기가 동서양을 아우르는 가장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해 소재로 삼았다. 글씨는 그가 직접 쓴 것이다.
기간 11월 17일~2024년 3월 3일
장소 DDP 잔디사랑방(실내 전시), 잔디언덕(야외 전시)
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sagmeister.com
1999년 그래픽 디자인계가 일순간 술렁였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미국디자인그래픽협회(AIGA)의 의뢰로 만든 강연 포스터 한 장 때문이었다. 칼로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긴 뒤에 촬영해 만든 이 디자인은 포스터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작업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사그마이스터는 동전 25만 개를 활용한 대형 설치 작업 ‘집착으로 인생은 힘들어지지만 작품은 더 좋아진다(Obsessions Make My Life Worse But My Work Better)’에서 강박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를 과시한 한편 2005년 토킹 헤즈, 2010년 데이비드 번David Byrne과 브라이언 이노Brian Eno의 앨범 디자인으로 그래미 어워즈 패키지 부문을 수상하며 상업성과 예술성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나의 집’. 미국 내 자가 소유자 비율이 1900년 47%에서 2020년 64%로 증가한 것을 표현했다.
‘내가 숨 쉬는 공기’. 전 세계 인구 10만 명당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줄고 있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한 작업이다.
그사이 매체 환경은 책과 포스터에서 웹으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바뀌었고, 숱한 디자이너들이 신성처럼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지길 거듭했다. 그럼에도 이 거장 디자이너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새기며 일선에서 물러날 법도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기 세계를 공고히 다지고 외연을 확장해나갔다. 2012년 ‘행복’, 2018년 ‘아름다움’을 주제로 깊은 성찰이 담긴 작품과 전시를 선보이기도 했다. 11월 17일부터 내년 3월 3일까지 DDP에서 선보이는 〈Now Is Better: 지금이 더 낫다〉전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최근 그가 주목하는 것은 데이터. 짧게는 50년, 길게는 200년에 걸쳐 축적한 객관적인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관람객과 소통한다. 삶의 질, 기대 수명, 죽음, 빈곤, 범죄율, 온실가스 배출 등 다양한 글로벌 이슈와 관련된 데이터를 시각화했는데 표현 방식 면에서 감상자의 이해를 돕는 데 방점을 둔 인포그래픽과 정반대로 접근한다. 데이터에 혼합 매체를 결합해 변형한 고전 회화, 렌티큘러 프린트를 활용한 대형 그래픽, 의류·컵·손목시계 등 데이터를 다양하게 시각적으로 변주한 100여 점의 디자인은 하나같이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이에 대해 사그마이스터는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나왔으면 했다”라는 말로 취지를 설명했다.
‘냄새 나는 부자 2’. 지난 세기 부자들의 자산을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해 순위를 매겼다. 1위는 존 D. 록펠러다.
비교적 최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그래픽은 렌티큘러 프린트를 활용해 완성했다.
데이터를 긍정의 도구로 활용한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로마에서 만난 한 저명한 변호사와의 대화가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 변호사는 혼란한 국제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민주주의는 끝났다’고 이야기했지만, 사그마이스터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전 세계에 9개밖에 없던 민주주의국가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니 세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 그의 논리다. 실제로 전시 전반에는 그만의 낙관주의가 녹아 있다.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가 인구 1만 명당 25명꼴이었던 1920년대에 비해 기술이 발달한 2020년에는 단 2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연간 501억 달러 규모의 미술 시장이 거대해 보여도 503억 달러에 달하는 전 세계 기저귀 판매량보다 적다는 사실로 예술의 지나친 자본주의화를 우려하는 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흉흉한 뉴스로 가득한 이 시대에 시차 교정을 종용하는 그의 작품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상기시킨다. 물론 그가 대책 없는 낙관론자는 아니다. 2018년 데이터를 토대로 X(당시 트위터)에서 거짓이 퍼지는 속도가 진실의 경우보다 6배 빠른 것을 꼬집기도 한다. ‘디자이너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당근과 채찍이 모두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이 반영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그마이스터는 이번 전시에서 한국의 박물관 수, 쌀 수확량, 연간 DDP 방문객 수 등의 데이터를 적용한 서울에디션 작품 5점을 공개했다. 또 1~8m에 달하는 에어 댄서 120개를 활용해 지난 120년 동안 한국인의 기대 수명이 4배가량 늘어났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야외 전시작 ‘We’d rather be alive than dead: 삶은 그 어떤 경우에도 죽음보다 아름답다’를 DDP 잔디언덕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dd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