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고쳤다. 아파트를 대대적으로 바꿀 수는 없으나 떼어내도 되는 문, 털어내서 높이를 올릴 수 있는 천장 등을 손보았다. 무엇보다 20년 넘게 사용하던 어두운 갈색 마루와 벽, 천장을 모두 흰색으로 바꿨다. 바닥색까지 희게 바꾸었더니 공간이 크게 달라 보였다. 꼭 필요한 물건이나 자주 쓰는 물건을 드러나게 수납하고, 좋아하는 작품을 걸고 보니 취향이 드러났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힘을 빌렸다. 그들에게 공간부터 재료까지 이곳을 바꾼 이야기를 낱낱이 들었다.
한눈에 보이는 공간이고자 한 거실. 긴 다이닝 테이블을 중심으로 왼쪽의 소파 존, 부엌과 입구 쪽 복도, 안방으로 들어가는 복도와 책장 벽까지 한눈에 보인다. 부엌에 있던 문도 떼어버렸다. 왼쪽 소파 옆 꽃 그림은 김종학 화백, 부엌 입구의 요리 그림은 중국 리진 작가, 오른쪽 책장 옆 그림은 김택상 작가의 작품.
거실 벽면 수납장 위에 서예와 차 도구를 씻을 수 있도록 마련한 개수대.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 없이 한강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이곳은 집주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버무려진 집합소다. 그가 오랫동안 삶을 영위해온 집이 몇 개월간의 수리를 거쳐 새롭게 태어났다. 이를 위해 인테리어 디자이너 신경옥, 동선동플랜 장병익 소장이 기본 기획과 시공을 맡았다.
“어느 날 욕실에 문제가 생겼다고 한번 봐달라고 해서 갔다가 일이 커졌어요. 이 아파트는 30평대 집 두 채를 합친 터라 구조가 특이하고 미로 같았어요. 복도에 가득 늘어선 책부터 시작해 물건과 수납공간이 정말 많았죠. 인테리어를 한다면 버리는 것이 첫 번째다, 보이지 않는 수납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말에 꽂히신 것 같아요. 그러고서 덜컥 집을 고치게 됐으니까요.” 그런 중에 나이가 더 들면 집 고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말도 대수선하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되었다.
거실로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모습. 가끔 붓 공부를 한다는 긴 책상, 그 앞에 부클레 원단으로 커버링한 프리츠 한센의 스완 체어와 티 테이블이 있다. 가로로 기다란 그림 ‘블루 가든’과 맞은편 벽에 걸린 릴리 펜던트 조명의 그림은 김선형 작가 작품. 제품에 드로잉이 더해져 작품이 됐다. 오른쪽 ‘외나무 다리 위에서’ 그림은 재미 화가 김원숙의 작품(1996). 그 아래 돌확에 조성한 정원은 그림과 어울리도록 여러 번 고심해 만들었다. 오디오는 오드ODE의 비메스터Burmester.
거실에 있던 박용식 작가 작품 ‘Dog & Bottle in Dusseldorf’. 2006년 아트 사이드 화랑 컬렉션.
신경옥 디자이너가 전한 일화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번 프로젝트에서 집주인과 디자이너는 비움을 채택했다. “벽을 따라 ‘ㄷ’자로 난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절반 넘게 버렸고, 책꽂이는 안쪽 복도에만 설치했어요. 주방도 원래는 문과 벽으로 막혀 있었는데, 구조체 기둥만 남기고 가능한 한 열어놓았고요.” 이렇게 비우고 줄여서 공간의 민얼굴을 찾고, 집주인의 생활 위에 디자이너 신경옥의 스타일을 하나씩 정돈해 올렸다.
안방과 욕실로 향하는 복도의 책장은 벽면의 일부처럼 제작했다. 오른쪽 의자는 박여숙화랑 컬렉션 중 건축가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의 래그Rag 체어. 정면에 보이는 긴 장은 최병훈 작가의 CD 보관장.
현관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장 정원. 앉아서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고재석을 설치하고 그 안쪽에 이끼와 돌로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부족한 햇빛은 식물용 조명을 달아 보완했다.
정구호 작가의 작품 ‘평양반닫이’는 조은숙갤러리 전시에서. 오른쪽에는 최병훈 작가의 돌 나무 함지. 그 위는 황규백 작가의 그림.
“최근 유행하는 단어인 비스포크 하우스가 딱 맞는 표현이에요. 냉장고는 LG 오브제를 썼지만.(웃음) 그만큼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이곳에서 행하는 행위가 확실했거든요. 거실 중심에 사선으로 배치한 4m 가까이 되는 다이닝 테이블은 그 자체가 파격입니다. 이런 스케치를 그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집주인이 가장 귀한 소재인 옻칠을 제안했을 때 이 테이블이 존재감을 확실히 가질 수 있으리라 싶었습니다. 그 과정은 복잡하고 길었지만요. 또한 테이블 위 세 개의 커다란 원반 펜던트 조명등은 오피스에나 어울리는 크기인데, 흡음재료로 역할 할 뿐 아니라 테이블과 함께 이 공간의 디자인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집주인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 보컨셉의 2.5인용 카키색 베른 소파, 김종학 화백의 꽃 그림(1994), 강화도령에 의뢰해 제작한 왕골 화문석, 허성하 소장이 만든 정원이 하나의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소파에 앉으면 한강이 길게 보인다.
거실 개수대 아래 수납장에 보관하던 옛 그릇들.
장병익 소장의 말대로 이곳의 다이닝 테이블은 일반 집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다. 식구가 많거나 손님을 자주 초대하는 것도 아니라지만, 이 테이블은 식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신문을 펼쳐놓는가 하면 작업하던 모든 것을 올려두기도 한다. “이번에 전용복 선생님 작업실도 함께 가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옻은 그야말로 방수, 방습, 방충이 되는 친환경 천연 도료로 특히 주방 가구에는 매우 적합한 소재더군요.” 신경옥 디자이너도 한마디 거든다.
욕실 풍경 또한 마찬가지다. “드레스룸의 창은 산 사이로 남산타워가 내다보이는 뷰가 멋졌지만, 이곳에서는 옷을 바래게 할 뿐이었어요. 집주인은 욕실과 위치를 바꾸기를 원했습니다. 이 작업이 큰 공사였죠. 욕조에 앉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배치하고, 앉았을 때의 눈높이에 맞춰 단을 높였습니다.” 창이 서향이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석양이 드라마틱한 풍경을 연출한다. 이 밖에도 거실의 소파 테이블과 책상, 일기를 쓰는 안방 책상 등 집 안 곳곳의 테이블은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는 집주인의 습관을 받아준다.
주방 전경. 신경옥 디자이너와 장병익 소장이 설계하고 한샘리하우스 휴먼디자인이 제작한 싱크대와 하부장, 아일랜드 테이블 겸 수납장, 신경옥 디자이너가 고른 고가구 찬장까지 전용복 작가가 옻칠을 했다. 오래전 담양에서 사 온 바구니와 그 아래 홍현주 작가의 나무 숟가락 시리즈, 임상봉 사보 빈티지 컬렉션 중 저울은 오랫동안 갖고 있던 부엌 소품이다.
창을 통해 남산이 멀리 보이는 욕실. 욕조에 앉아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단을 높였다.
“집주인의 생활을 도면화해 지은 것이 곧 이 집이에요. 그래서 공간을 보면 생활이 보입니다.” 신경옥 디자이너는 한강 뷰 가득한 거실 소파에서 아침 햇살을 벗 삼아 신문을 읽는 집주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뿐이랴. 거실 한가운데의 책상에서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서예를 하는 장면이, 디자이너의 제안으로 벽면에 설치한 개수대에서는 차를 마신 후 도구를 정갈하게 씻고 말리는 풍경이, 주방 커피 바에서는 커피를 내리며 잘 어울리는 찻잔을 고르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가구와 동선에 집주인의 생활이 깃들었다면 한두 곳에 들어선 고재, 완벽하지 않아 더욱 편안한 아치 천장, 따뜻하게 스며드는 하얀 색감과 질감은 디자이너 신경옥의 언어다. “나 인테리어했다고 티 내거나 완벽하게 오와 열을 맞추는 건 답답해요. 못나거나 안 맞는 구석도 있으면서 은근히 스며들게, 자연스럽게 작업했습니다.”
안방으로 향하는 복도 한쪽에는 직헌 허달재의 병풍과 이수경 작가의 초기 도자 작품을 배치했다.
안방의 침대 옆, 화려한 색상의 자수가 상징인 옛 베개들을 배치한 코너. 그 위 작은 서랍장도 신경옥 디자이너가 오래된 가구를 구입해 흰색을 칠한 것.
가구나 작품, 오랫동안 모아온 오브제가 워낙 많다 보니 공간은 바탕이 되는 데 집중했다. 마감재는 최대한 종류를 줄이고 색감을 비슷하게 맞췄다. “바닥은 경계가 생기지 않고 쿠션감이 살짝 느껴지는 코르크 시멘트로 바꿨고, 벽면은 회벽 느낌이 나는 스토를 사용해 색감과 질감을 통일했어요. 스토는 미장하듯이 바르고 갈아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 질감을 만들어요. 작업 시간이 꽤 걸리지만, 견고하고 시간이 지나도 변화가 적은 것이 장점입니다. 오염되어도 살짝 갈아주면 새것처럼 쓸 수 있죠. 습도 조절 능력도 뛰어납니다.” 장병익 소장은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는 부분에도 새로운 자재를 쓰기보다는 약간의 틈을 두어 자연스럽게 경계를 정리했다. 그 결과 바닥과 벽 모두 하나의 면처럼 이어져 투명하고 깨끗한 배경이 되어준다.
욕실로 들어가는 복도 문. 완벽한 호를 그리는 대신 부드럽게 떨어지며 눈을 편안하게 하는 아치는 디자이너 신경옥의 언어다. 이를 위해 기존의 중문을 없앴다. 경계가 생기지 않는 스토로 마감해 조형미와 공간감이 더욱 살아났다.
욕실 쪽에서 보이는 복도. 사각뿐인 공간에 잠깐의 부드러움이 생겼다.
이 밖에도 옅은 감색이 인상적인 주방 테이블과 가구, 거실의 기다란 다이닝 테이블에는 옻칠 장인 전용복 작가의 작업이, 현관에서 한 번, 볕 잘 드는 거실 양쪽에서 또 한 번 마주하는 실내 작은 정원에는 조경 스튜디오 폭스더그린 허성하 소장의 손길이 담겼다.
“종일 머물러도 늘 기분 좋은 집이 되길 바라며 작업했어요.”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이 입 모아 하는 말은 결국 사는 이가 행복한 집이어야 한다는 것. 집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지만 아파트가 대부분인 한국에서 이 명제는 요원하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노베이션은 주어진 한계에서 벗어나 삶에 집을 맞춰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머무는 이의 삶이 고스란히 안착한 이곳은 생활과 흔적이 쌓여 다시 한번 진정한 ‘나의 집’이 되어가고 있다.
눈여겨봐야 할 집 속 디테일과 소재
마감재: 스토Sto
욕실을 제외한 벽면은 회벽 질감의 외장재인 스토로 마감했다. 미장하듯 펴 바르고 흙손질로 질감을 구현했으며, 거실 천장에는 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흡음 페인트를 칠했다. 마피코퍼레이션(070-4247-0708)
바닥재: 코르크스 리퀴드 리노Corques Liquid Lino
욕실을 제외한 바닥에는 코르크스 리퀴드 리노(색상 W300 S)를 시공했다. 코르크와 식물성기름, 아마인유, 나무 가루, 석회암 등 천연 재료로 만든 지속 가능한 바닥재다. 욕실에는 방수 성능이 탁월한 마이크로토핑을 사용했다. 조인엔터프라이즈(02-563-3831)
타일: 피코 컬렉션Pico Collection
욕실 벽면을 채운 이탈리아 타일 브랜드 무티나Mutina의 피코 컬렉션. 세계적 디자이너 로낭&에르완 부홀렉과 협업한 제품으로 올록볼록한 도트 디자인과 질감이 매력적이다. 윤현상재(02-3444-4366)
주방 가구
하부장, 아일랜드 테이블 겸 수납장은 신경옥 디자이너와 장병익 소장이 설계하고 한샘리하우스 휴먼디자인이 맞춤 제작했다. 한샘리하우스 휴먼디자인(1644-7913)
조명: 릴리Lily 펜던트 흡음 조명
거실과 주방 테이블 위에는 스웨덴 리빙 브랜드 압스트락타Abstracta의 흡음 조명 릴리를 설치했다. 수련잎을 모티프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형태이고, 사무실에서 쓸 수 있을 정도의 흡음 능력을 발휘한다. 오름앤컴퍼니(02-2084-3456)
주방 가전: LG전자 오브제컬렉션
주방에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조합한 오브제컬렉션 워시타워를 뒀다.접이식 도어를 달아 평소에는 가전이 보이지 않게 했고, 그 옆에는 손빨래를 할 수 있도록 수도를 따로 설치했다. LG전자(02-3777-1114)
이 집에 손길을 더한 사람들
1세대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신경옥은 오래된 가구와 고재, 따뜻한 화이트 톤의 마감재를 활용해 서정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공간을 짓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신경옥작업실(@shinkyoungok.studio)
“그리스의 어느 리조트에 온듯,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느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집주인도 거의 같이 디자인을 하게 됐죠. 처음에 계획한 분위기와 크게 달라졌음에도 편안한 공간으로 완성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특징이에요.”
동선동플랜 장병익 소장은 니드이십일에서 시공 업무를 전담하며 일을 시작했고 스튜디오 베이스를 거쳐 2016년 독립했다. 현재 동선동플랜과 일이목재라는 목재소를 운영하며, 신경옥 디자이너와 꾸준히 함께 작업한다. 동선동플랜(@dongsundong_plan)
“아침에 다 같이 현장에 모여 미팅할 때가 많았는데, 집주인을 설득할 필요 없이 마치 브레인스토밍을 하듯 시너지가 났어요. 여느 프로젝트를 할 때와 다른 경험이라 즐거웠습니다. 크지 않은 아파트였지만 디테일을 많이 챙겼습니다.”
옻칠 작가 전용복은 독학으로 옻칠을 공부한 후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1년 일본 최고 연회장인 도쿄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하며 세계적 칠예 장인으로 발돋움했다. 지금도 연구와 작품 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옻칠을 알리고 있다. 전용복 아트 스페이스(@junyongbok_official)
“집주인은 옻칠의 장점을 익히 알고 작업을 의뢰했어요. 실용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디자인을 원했고, 사용하면서 눈이 피곤하지 않도록 무광의 옅은 감색으로 칠해달라고 했죠. 과정은 까다로웠지만 결과물을 보니 그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폭스더그린 허성하 소장은 홍익대학교에서 목조형 가구를 공부하고, 가구와 인테리어디자인을 하다 조경으로 작업 영역을 바꿔 폭스더그린을 설립했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식물을 매개로 작업하며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 있다. 폭스더그린(@fox.thegreen)
“조경은 기존에 있던 회화나 오브제 작품과의 조화가 가장 중요했어요. 그래서 잘 어울리는 질감을 고심했고, 빛이 충분하지 않은 현관은 이끼와 음지 식물로 정원을 조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