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화단의 거장 박서보 화백이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위층에서 삐거덕삐거덕 나무 복도를 걷는 소리가 난다. 유서 깊은 공간이 무척 아름다운 갤러리다.” 91세 나이에도 정정한 현역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갤러리는 어디였을까? 주인공은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돌담길 끝자락에 자리한 두손갤러리. 1928년 지은 옛 구세군회관에 새롭게 터를 잡았지만, 사실 두손갤러리의 시작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전설적 아트 딜러’라 일컫는 김양수 대표가 있다.
두손갤러리 김양수 대표가 각별한 인연을 맺은 백남준의 비디오 벽 작품 ‘M200’ 앞에서 있다. 열다섯 나이에 고미술과 조우한 뒤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 하나, 예술이다. 그가 천생 아트 딜러이자 갤러리스트인 이유다.
지금 두손갤러리에서는 재개관 이후 두 번째 전시 <한국미술의 서사(A Narrative of Korean Art)>가 열리고 있다. 전시 공간인 근대건축물 내부는 처음 지은 이후 지금까지 94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모습이다. 좁은 복도와 계단 난간은 목조 그대로이고, 각각의 공간은 관람객의 호흡에 딱 맞는 인간적 규모를 갖추고 있다. 작품을 지나칠 때마다 박자를 맞추듯 삐걱대는 마룻바닥 소리는 전시장을 알맞게 흐르는 음악 소리 같다. 갤러리 전체에는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잇는 통시적 미감’을 오롯이 느끼게 하려는 전시 의도에 걸맞게 고려청자부터 고미술 목기, 금속공예와 단색화, 비디오 아트, 추상미술이 어우러져 있다.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박서보, 서세옥, 권진규, 이우환, 백남준, 윤형근, 윤명로, 전광영의 작품이 백자 달항아리·고가구·다완·민화와 절묘하게 배치되어 서로를 추어올린다. 불쑥, 어느 안목 높은 아트 컬렉터의 솜씨가 빚어낸 내밀한 공간을 둘러보고 있다는 기시감이 들 정도다.
30년 만에 재개관한 두손갤러리를 품은 건물은 1928년 지은 근대건축물이다. 네 개의 기둥과 지붕이 당당한 인상을 주는 파사드가 멋스럽다.
는 리빙앤틱 앤 리빙아트의 첫 글자를 따 제호로 삼은 문화 코멘터리 매거진이다. 70세에 만들기 시작한 잡지에는 한국미술에 대한 김 대표의 독특한 해석과 안목이 빼곡하다.
1세대 대표 갤러리 ‘두손’의 시작
김양수 대표가 자신의 이름 뜻을 따서 지은 갤러리 ‘두손’을 처음 오픈한 건 1984년의 일이다. 종로구 동숭동에 자리한,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한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김 대표는 앞선 안목과 기획으로 지금은 한국 미술의 거장이 된 화가들의 전시를 열고 후원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앤디 워홀 등 미국 컨템 퍼러리 아트를 대표하는 스타 작가들을 가장 먼저 소개하기도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였음에도 일찌감치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후, 고미술과 근대미술을 경유해 안착한 결과였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1세대 도예가인 지순택 선생님 가마에서 처음 도자기를 접했어요. 미술반 선배들 따라서 우연히 간 건데, 결과적으로 고미술에 빠지는 계기가 됐어요. 대학 시절 아예 청계천8가에 골동품 가게를 차린 게 고미술 컬렉션의 시작이었어요.” 하지만 말이 좋아 고미술 컬렉션이지 실제론 보물찾기에 가까웠다. 청계천 8가와 황학동에는 저녁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이 챙긴 전리품을 경쟁하듯 자랑하곤 했다. 김 대표는 서양화가 권옥연,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 한창기, 자수박물관을 만든 허동화 선생 사이에서 막내 노릇을 하며 ‘보물을 찾는’ 안목을 길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에스트로 백남준의 작품이 제일 먼저 관람자를 맞이한다.
서른 살 무렵 떠난 이탈리아 여행은 갤러리스트 김양수에게 또 다른 개안을 안겨준 계기가 됐다. 스무 살 시절 배낭여행으로 접한 이탈리아와는 완전히 달라진,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알고, 디자인을 사랑하고, 놀기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방향성을 구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텍스트로 접한 건축 잡지 <도무스>는 그야말로 탁월한 교재였다. 애국자가 될 생각은 안 했지만, ‘한국 예술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풀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이 생각은 ‘지금 한국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로 이어졌고, 결론은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모아 졌다. 그 시절, 김창열과 정창섭 그리고 박서보는 가장 한국적인 소재인 ‘한지’에 주목하고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수행 중이었다. “일제와 미국 시대를 지나 우리 것을 찾자는 단색화의 불씨가 생겨난 시점이 그때예요. 그걸 포착하고 두손갤리러에서 전시를 시작했죠. 당시 전시를 진행한 작가들이 지금은 한국 화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또 하나, 백남준 선생이 30여 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면서 첫 회고전을 개최하게 됐는데, 세계적 마에스트로인 백남준을 우리만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어요. 저는 그때가 한국 아트 신scene의 시작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요.”
인간적 사이즈의 갤러리 내부. 박서보와 권진규의 작품이 나란하고(위), 서세옥의 ‘사람들’ 앞에 이수경의 도자기 최근 작과 청자 사자 향로가 줄지어 있다.(아래)
하지만 선구안 좋은 아트 딜러의 혁혁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갤러리를 시작으로 건설업과 유통 등 손대는 것마다 성공을 거두자 거창한 포부가 애드벌룬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두손이 지은 집에 두손이 디자인한 가구를 놓고, 두손이 추천한 그림을 걸고, 두손이 디자인한 옷을 입히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엉망이었다. “갤러리가 잘되니까 건방을 떤 거예요. 예술이 삶을 벗어나면 안 되는데….” 모든 게 사라졌고, 그가 손에 쥔 건 달랑 뉴욕행 비행기 티켓 하나뿐이었다.
백남준과 19세기의 절묘한 만남.
뉴욕 시절을 경유해 다시 두손갤러리로
아티스트 백남준이 작업한 모델 중 유일한 일반인인 ‘따라지 김양수’는 뉴욕에서도 쉬는 법이 없었다. 허먼밀러에서 만들던 임스 체어나 조지 넬슨 의자를 고물상에서 싸게 사들여 에스프레소 바 ‘언리미티드Unlimited’를 오픈했다. 하루 매상이 3백 달러이던 이 공간은 ‘모던이 돌아왔다’라는 제목을 달고 <뉴욕타임스>에 소개되면서 맨해튼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하루 매상은 5천 달러로 뛰었다. ‘스페이스 언타이틀드Space Untitled’라는 이름의 대안 공간도 열었다.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구원다谷文達의 작품으로 첫 전시를 개최했다. 그 시절에 대한 소회를 훗날 김 대표는 이렇게 적었다. “서울에서 하던 사업이 부도 나서 미국으로 건너간 후 다시 갤러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오카다 겐조의 작품을 구해 일본 친구의 도움으로 팔고 그 돈을 종잣돈으로 갤러리와 에스프레소 바를 시작했다. (구원다 전시는) 용서와 화합의 고해성사인 첫 전시였다.”
심문섭의 평면 작업 ‘The Presentation’ 앞에 놓인 엄태정의 ‘너와 나 사이에 환대하는 공간’.
그렇게 12년이 흘렀다. 안정을 누리던 뉴욕 생활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아트 신의 중심인 뉴욕에서 한 시절을 보내며 경험하고 배운 걸 다시 베풀고 싶었다. 다민족·다인종 문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다음에는 동양 중심의 시대가 올 거라는 판단도 섰다. 귀국 후 이태원 경리단길에 자리한 ‘인터아트채널’로 존재감을 알리던 김 대표가 3년의 워밍업 끝에 현재의 공간에 ‘두손’이라는 이름을 되살리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갤러리스트이자 아트 딜러라는 사명감과 소명이 동력처럼 자리하고 있다. “정리를 위한 시작이라고 봐요. 한국 미술의 시작점에 두손이 있었으니, 다음 단계는 한국 미술을 중점적으로 알리고 싶다는 사명감이 생겨요. 예술의 초심이나 근간이 흐려지는 상황에서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찾고 싶기도 합니다. 근현대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인 정동과 개화기에 지은 공간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건 그런 차원에서 남다른 느낌이 들고요.”
19세기 장 위에 놓인 백자 달항아리 위로 이우환의 1978년 작 ‘From Point’가 걸려 있다.
올해 나이 일흔인 현역 아트 딜러 김양수 대표는 처음 고미술 컬렉션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공예, 디자인, 현대미술 등 아트 신 전반의 흐름 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그것은 인터뷰 중간중간 튀어나온 단어 ‘소명’, 즉 ‘일과 삶이 구분 안 되는 지경’이라는 힘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예술과 함께 보낸 지금까지의 생애를 정리한 책에 그는 이런 문장을 적어놓았다. “예술을 외면하고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존재하는 생의 근거를 예술에서 찾는 눈먼 자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