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누구보다 강렬한 삶을 산 예술가 30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책 <불꽃으로 살다>가 출간됐다. 예술의 품 안에서 영원의 삶을 살아갈 5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 작업은 일종의 불멸을 향한 추구입니다. 작품들은 호흡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을 것입니다.” 키스 해링은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요절한 예술가의 작품을 접할 때, ‘작가는 사라져도 작품은 영원하다’라는 이 흔한 말은 진실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효하게 느껴진다. 소호하우스 앤 컴퍼니의 총괄 책임자이자 영국의 미술사학자인 저자 케이트 브라이언Kate Bryan은 반 고흐가 작품에 매진한 기간은 10년, 모딜리아니는 6년밖에 안 된다는 사실 등을 주시하며 예술가 30인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고자 이 책을 펴냈다. 저자는 요절한 예술가들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방식과는 거리를 둔 채, 질병과 내·외부적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그들의 내밀한 삶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품 세계 등을 조명하며 다채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케이트 브라이언 지음, 김성환 옮김, 디자인하우스.
‘인체측정: 헬레나 왕녀’, 1960, 뉴욕 현대미술관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
들여다볼수록 심연이 떠오르는 푸른빛. 1960년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색으로 최초의 특허를 얻은 작가 이브 클랭. 10년 남짓 활동을 이어가다가 34세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배경에 합성수지 안료의 독성 때문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며 많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텅 빔’을 의미하는 선불교의 개념 ‘순야타’를 작품에 담고자 한 그는 여성의 몸에 페인트를 칠한 뒤 종이에 그 흔적을 남긴 대표작 ‘인체측정’ 연작으로 오늘날까지 예술가들의 사상 및 방법론에 영감을 주고 있다.
미지의 여성들과 함께 있는 데릭 말로의 초상’, 1962~1963, 런던 테이트 미술관, Ⓒ 폴린 보티 재
폴린 보티Pauline Boty, 1938~1966
28세에 요절한 폴린 보티는. 젠더 정치에 대한 목소리를 회화에 담으며 피터 블레이크, 리처드 해밀턴 등과 함께 1960년대 영국 팝 아트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당대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사후 예술사에서 오랜 기간 잊힌 인물로 남았다. 한 예술사가의 끈질긴 노력 끝에 켄트 지방의 헛간에서 작품이 발견되었고, 이후 전시를 통해 재조명받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이야기는 작품의 주제처럼 구조적 성차별에 의해 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한 사실과 맞물려 더욱 입체적인 감상을 유도한다.
‘조/고무 인간’, 1978, Ⓒ 로버트 메이플소프 재단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1946~1989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격렬히 반목하던 1980년대, 섹슈얼 장치와 동성애를 소재로 삼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에이즈로 인한 그의 죽음 이후에도 미국 사회에 큰 반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화상을 포함한 작품 ‘X 포트폴리오’ 등은 극단적 성행위를 다루는 BDSM을 주제로 삼지만 관음증적 시선이나 의도를 담지 않고 철저히 미적 관점에서 연출했으며, 사진 매체의 예술적 본질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다. 시대를 초월해 그의 사진이 불변의 미학적 가치를 지닌 이유다.
‘주거: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간’, 2017~2018, 니컬라스 그린 앤드 젤러스 스튜디오, Ⓒ 카디자 사예 재단
카디자 사예Khadija Saye, 1992~2017
아프리카 감비아에 뿌리를 두고, 런던에서 자란 작가 카디자 사예는 5년 전 제5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디아스포라 파빌리언에 작품을 전시한 뒤 곧장 예술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부모님이 쓰던 종교 의례용 도구를 활용하고 스스로 치료사로 분해 자화상의 방식으로 강렬한 사진 작업을 선보였다. 비엔날레가 개최된 뒤 고작 한 달 후 작가는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로 세상을 등졌다. 빛나는 재능을 세상에 오래도록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사후에도 수많은 그룹전에 작품이 전시되며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나의 삶은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에 포함된 구아슈화, 1941~1942, 암스테르담 유대인역사박물관
샤를로테 살로몬Charlotte Salomon, 1917~1943
임신 5개월인 상태로 26세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홀로코스트 희생자, 샤를로테 살로몬. 단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창작을 이어왔으나 그가 창조한 작품이 지닌 가치는 더욱 널리 알려져야 마땅하다. 암울한 역사 속에서 작가는 삶을 비장하게 바라보는 대신 환상적이고, 위트 있는 시선을 작품에 녹여냈다. 독일의 경가극 ‘징슈필’의 형식을 취하는 회화 769점과 340장의 대본으로 이루어진 대표작 ‘나의 삶은 삶인가? 아니면 연극인가?’는 징슈필을 ‘총체 예술’로 구축했다는 평을 받을 만큼 개성적이며 창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