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루틴에 맞춰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들이 있다. 1년 365일 일기 쓰듯 그림을 그리고, 수행하듯 캔버스 위에 붓질을 반복한다. 꾸준한 일상의 힘을 믿는 4명의 아티스트에게 ‘매일의 작업’에 대해 물었다.
김혜나
자연의 빛으로 그린 그림
‘나비와 나의 조가비 수집’
‘허밍’
자연의 색과 계절감이 느껴지는 추상회화를 선보여온 김혜나 작가는 자연광이 드는 오전부터 해 질 녘 전까지를 작업 시간으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그녀의 작품에서 빛을 머금은 듯한 색감과 질감, 붓 터치와 공간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최근 신사동 더 그레잇 컬렉션에서 5월 30일까지 열린 개인전 <허밍>을 통해 신작 회화와 미공개 드로잉을 선보였으며, 성수동 누하스 아뜰리에에서 진행 중인 <그 상상의 대화>전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작업의 영감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 사람, 동물, 자연 등에서 받은 인상이나 모양새 등을 추상적으로 발전시켜 캔버스에 옮긴다. 매일 산책을 즐기는데 덕분에 비교적 주변 풍경이나 계절의 변화, 공기의 온도 등을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다. 그것들을 기억에 담아두었다가 작업할 때 떠올려 그림으로 표현하곤 한다.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이유
그림은 지금껏 평생 함께해온, 나의 일이자 삶 그 자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운동하고, 휴식을 취하고, 취미 활동을 한다. 매일 주변을 관찰하고 거기서 발견하는, 삶에 스민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과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해왔다. 그런 매일이 모여 작가로서의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순간의 기억이 모여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들을 표현하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는 손을 쉬지 않기 위해 꾸준히 작업을 한다.
하루 작업량
오랜 습관이어서 따로 정해둔 분량은 없다. 식사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계량하지 않아도 감으로 적당한 양을 아는 것처럼, 어느정도 작업을 하고 나면 ‘이 부분은 이만하면 됐다’ 싶어 내일을 준비한다. 시간을 재며 작업하지는 않지만 대략 아침에 해 뜰 시간부터 해 질 시간까지를 기준으로 자연광에 의지해 그림을 그린다.
반복하는 작업의 힘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우연’의 매력을 캔버스에 극대화하는 것이 작업에 발전 요소가 된다. 매일의 루틴이 작가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찾아내고 기록해나갈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노상호
솔직하고 스마트한 지금 시대의 아트
‘TheGreatChapBook-ElseWhere01’
‘K-100’
가상 환경에서 수집한 이미지로 드로잉을 하고 이것을 영상, 설치, 출판, 퍼포먼스 등으로 확장하는 노상호. 무의식적으로 이미지를 접해 빠르게 소유하거나 공유하는 요즘 시대의 달라진 아트 소비 방식에 주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혁오 밴드의 앨범 재킷을 제작하며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높였고 뉴발란스, 휘슬러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도 진행했다.
최근 작업
요새는 주로 인스타그램에서 관심있게 팔로잉하는 것들을 위주로 그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3D CGI 작업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아닌 3D로 ‘조합’하는 것을 해보고 싶어 공부와 작업을 병행 중이다. 작업물은 인스타그램 계정(@copic.pic)에서 볼 수 있다.
루틴을 만든 계기
대학교 4학년 때, 진로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부담 없이 매일 뭐라도 그려보자는 마음으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빨리 완성할 수 있고, 끝낸 후에 드는 성취감이 좋아 꾸준히 그리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이유
‘워라밸’과 비슷한 개념인데, 시간을 정해놓지 않으면 종일 작업을 생각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스트레스와 피로가 누적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컨디션을 유지하며 작업하기 위한 방법이다.
하루 작업량
기본적으로 4시간은 무조건 그리려고 한다. 그 외에는 미팅이나 전시 설치 등 다른 업무의 유무에 따라 유동적이다. 보통 일어나자마자 오전 중에 그림을 먼저 그리고 이후 다른 일들을 처리한 후, 시간이 남으면 다시 작업을 하는 편이다. 전에는 ‘A4 드로잉 1점 이상, 캔버스 3호 정도 사이즈를 하루에 그린다’ 식으로 정확한 가이드를 마련해두고 작업했는데 지금은 시간으로 기준을 바꿨다. 4시간이 기본이지만 때로는 직장인처럼 야근도 한다.
반복하는 작업의 힘
루틴대로 작업하는 것은 불안감을 해소해주고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결과물이 3년, 5년 쌓였을 때 하나씩 차곡차곡, 얇게 쌓인 작업들을 되돌아보면 뿌듯하다. 작가로서의 방향성에 대한 여러 고민이 있지만 이런 감정이 꾸준히 작업하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게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콰야
매일 발견하는 일상의 특별함
‘셋’
‘Kiss’
‘가을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장미 꽃다발을 안고서’
‘밤의 사색’이라는 의미의 이름으로 활동 중인 아티스트 콰야Qwaya는 평범한 하루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을 독창적인 색감과 즉흥적인 터치로 표현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해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오랜 잔상을 남기는 그림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다. 6월 13일부터 7월 17일까지 이길이구 갤러리에서 습작, 드로잉부터 신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개인전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을 연다.
최근 작업
비슷한 이야기를 담기 때문에 기존 작업과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주기 위해 프로젝트성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년 전부터는 대상을 마주해 대화를 나누며 초상 작업을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이전에는 낯선 이들을 대상으로 했고, 지금은 지인을 상대로 작업하고 있다. 일대일로 마주앉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초상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의미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무언가 불확실한, 정확히 형태를 알 수 없는 흐릿한 분위기의 작업에 매료돼 있다.
작업의 영감
지인과의 대화나 길 위에서 마주하는 풍경 등 일상적인 경험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평소 길을 걸으며 주변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나만의 이야기로 재해석해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일상의 이야기가 전반적인 작업의 소재가 된다.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이유
꾸준히 작업하기 위해. 작품 안에 나만의 아이디어나 견해를 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반복해서 연습 중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리는 그림 안에서 더 많은 것을 잘 그리고 싶은 욕심도 있다. 미술 비전공자로서 계속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지금의 습관이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만드는 자유를 준다.
하루 작업량
시간이나 분량을 정해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그림을 붙들고 있을 때도 있고, 천천히 쉬어 가는 날도 있다.
반복하는 작업의 힘
정해진 루틴대로 성실히 하는 편이라기보단 자유로움 속에서 그 시간을 즐기는 타입에 가깝다. 예술가로서 작업은 평생 이어가야 할 루틴인 만큼, 꾸준히 반복하는 작업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매일 반복하는 작업은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 기술적인 부분을 항상 좋은 컨디션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바이런 킴
20년 동안 매주 그린 일요일 하늘
‘Sunday Painting 5/11/09’
‘Sunday Painting 9/23/09’
‘Sunday Painting 5/17/15’
‘Sunday Painting 2/2/16’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바이런 킴Byron Kim.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특유의 조형 언어로 주목받으며 지난 30여 년간 국내외 미술관과 갤러리, 비엔날레 등에서 작품을 선보여왔다. 그의 대표 연작 ‘선데이 페인팅Sunday Paintings’은 2001년부터 지금까지 매주 일요일, 동일한 크기의 소형 캔버스에 하늘을 그린 후 그날의 일상과 감정을 펜으로 적어 넣은 작품. 1000여 점의 그림과 글 속에 소박한 정서와 깊은 통찰이 두루 담겨 있다.
루틴을 만든 계기
유럽 등 서구에서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작가를 ‘선데이 페인터Sunday Painter’라 부른다. 정말 좋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들처럼 부담을 내려놓고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시작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에게 친숙하지만 정확히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하늘을 대상으로 삼았고, 세계 어디에 있든 일요일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트렁크에 들어가는 작은 캔버스를 택했다.
매주 하늘을 그리며 느낀 점
예술은 주관적이라는 것. 게으르고 피곤할 때면 드넓은 하늘에서도 파란 천처럼 구름 한 점 없는 부분을 바라보게 되는 식이다. 또 한 가지는 어디서나 같은 모습일 줄 알았던 하늘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는 것. 예를 들어 샌디에이고의 라호야 비치에서 하늘을 그릴 때면 항상 쿨 그레이 컬러를 조금 섞어야 한다.
반복하는 작업의 힘
평범한 하루가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되듯, 일요일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을 ‘영원히’ 이어가는 것은 예술가에게 하나의 큰 성과다. 매주 일요일 작은 그림을 그리는 루틴은 아티스트로서 ‘롱런’을 위해 필수적인 심리적 안정을 찾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