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2월이면 국내 최대의 디자인 페스티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 20주년을 맞이한다. 강산이 10년이 아니라 1년도 길다 하고 숨 가쁘게 바뀌는 이 시대에 근성 있게 20주년을 지속해왔으니 그 의미는 사뭇 남다르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이 행사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들의 시각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들이 디자인계의 대표 축제에 아트 디렉터가 된 것은 상징적이다.
(왼쪽부터) 김경철, 권준호, 김어진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는 D를 괄호처럼 활용해 다양한 주제와 테마를 아우른다.
일상의실천이 새로운 로고 개발을 위해 고민한 과정이 담긴 작업 스케치.
2021서울디자인페스티벌 포스터를 위한 다양한 비주얼 테스트.
아트 디렉터 일상의실천
아이덴티티 & 그래픽 디자인 권준호
일러스트레이션 정호숙, 조아영
사진 김진솔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아트 디렉터를 맡게 된 소감이 궁금하다.
권준호 사실 시작은 웹사이트 리뉴얼이었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측에서 대대적인 리뉴얼을 원해 처음 미팅을 가졌는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로고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웹은 콘텐츠를 담는 큰 그릇이기 때문에 이를 바꿀 경우 아이덴티티의 재정립도 불가피하다고 본 것이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톤앤매너와 룩을 통합하는 과정이 훨씬 보람 있게 느껴지기에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될 것 같다. 현재 아이덴티티와 웹사이트, 페스티벌 홍보에 사용하는 전반적인 그래픽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김어진 약자인 ‘SDF’ 외에 다른 심벌이나 워드타입이 없어 매년 다른 서체를 사용해 풀네임을 기재했다는 점이 다소 아쉬웠다. 국문 로고타이프가 없다는 점, 아이덴티티 컬러인 레드 외에 다양한 컬러 변주가 부족한 점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 느꼈다.
이번 아이덴티티를 구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권준호 ‘조금 더 유연한 기본형’에 초점을 맞추어 고민했다. 페스티벌이 그 어떤 주제를 내세워도, 심지어 주제가 없어도 적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단순한 로고가 아닌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이번 아이덴티티는 디자인 페스티벌의 ‘D’를 괄호처럼 변형해 주제나 상황에 맞게 달리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각자 맡은 파트가 궁금하다.
권준호 나와 김어진이 아이덴티티와 행사 전반의 그래픽을, 웹사이트는 주로 김경철이 작업한다. 담당 업무를 분담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방향성은 늘 그렇듯 같이 정한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의 로고 타임라인
일상의실천에게 그동안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은 눈여겨보던 행사였는지 궁금하다. 아니었다면 그 이유를 말해달라.
김경철 솔직히 대학생 때 방문했던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은 내가 졸업해서 할 수 있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당시 나는 시각디자인과 학생이었고, 행사에는 제품이나 가구 브랜드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픽 디자이너가 주인공이 되는 페스티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가 키 비주얼을 맡는 등 참여가 늘더라. 최근 3~4년 전부터 꾸준히 관심 있게 지켜봤다. 김어진 작년 ‘뉴 노멀’ 테마의 키 비주얼도 매우 실험적이고 디자이너의 주관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 페스티벌이 짊어져야 할 진정한 고민이 시작된 것 아닐까.
권준호 2019년의 서울 에디션을 흥미롭게 봤다. 한동안 런던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자 ‘도시 브랜딩’에 대한 차이가 훅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서울은 매력적인 문화적 요소가 많지만 덜, 혹은 잘못 발굴되던 시기였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을지로의 재개발 같은 경우도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의 변화에만 치중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다. 반면 ‘서울 에디션’에서는 도시가 가진 문화적 정체성을 디자이너들이 다양하게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도 들었고.
일상의실천도 어느덧 8년 차다. 디자인 스튜디오로서 작업 과정에 변화가 있나?
김경철 원래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했지만 5년 전부터 코딩을 독학해 현재 웹 개발과 디자인을 함께 하고 있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웹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바일과 웹 작업이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특히 요즘은 팬데믹 상황이고, 직접 무언가를 보러 갈 수 없으니 모바일로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단순히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자와의 인터랙션까지 고민해야 한다.
일상의실천이 제안한 서울디자인페스티벌 포스터의 다양한 변주.
스튜디오를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디자인업계에 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지?
김경철 많은 디자이너들이 에이전시에서 나와 스튜디오 단위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작업을 통해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내게 된 것 같다. 자신에게 맞는, 자신의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파트너와 결과물에 집중하는 일이 많아졌다.
김어진 클라이언트에게도 디자인이 해석되는 과정에서 논리가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도 디자인을 제안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 중 하나다. 예전에는 컬러와 형태에 대한 근거를 취향에 맞춰 내린 결정이 많았다면, 지금은 아이덴티티나 비주얼의 톤앤매너 등 시각적 맥락상의 논리로 설득이 가능해졌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웃음)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기술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권준호 디자인을 대하는 환경과 분위기의 환기가 필요하다. 조너선 반브룩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캐주얼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다양한 결정이 이루어지길래, 클라이언트가 가고 난 후 담당자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빅토리아 & 앨버트 관장이라는 거다. 사실 한국에서 일하다 보면 실무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컨펌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 하면 당황하기도 한다. 이제는 브랜딩이나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디자이너와 관장은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최종 결정자에게 가기 전까지 많은 단계를 거치면 그 과정에서 디자인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의사소통의 단계가 줄고 디자인에 관한 대화가 활발한 환경이라면, 좋은 디자인이 나올 기반이 마련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