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건 닮고 싶은 면이 있다는 뜻이다. ‘원투차차차’라는 재미난 이름으로 공간에 감각을 불어넣는 디자이너 권의현은 ‘집수리 건축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김재관을 존경하는 선배로 꼽았다. 기다리던 만남의 날, 촬영 현장의 훈훈한 공기는 의미 깊은 언어들로 꽉 채워졌다.
공간 연출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요즘 러브콜을 많이 받는 대세 디자이너로 ‘원투차차차’를 쉽게 떠올릴 것이다. 이친근한 이름으로 활동하는 권의현 디자이너는 2017년 청담동 퀸마마마켓의 리뉴얼 프로젝트로 이름을 알리더니, 지난 12월에 열린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의 공동 아트 디렉터를 맡는가 하면, 노들섬 래코드 아뜰리에, 효창동 꽃술 등 최근 주목받는 공간이라면 어김없이 크리에이터로서 관여하고 있다. 작게는 의자나 조명등 디자인부터 크게는 공간의 구성을 맡으며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간다. 조형 예술을 전공하고, 미디어 아트 작가의 조력자로 설치미술을 하다가 가구 제작을 하기까지 정처 없이 비틀대며 길을 찾아온 지 10여 년 만에 빛을 본 셈이다. 그가 명성에 비해 겸손하고 진솔한 매력을 지닌 건 그런 오랜 방황과 고뇌의 기간이 새겨준 훈장이리라. 권의현이 존경하노라 꼽은 건축가 김재관은 뼛속부터 겸허한 인물이다. 공간 디자인계에서 이른바 ‘왕좌의 자리’로 여겨지는 건축가이지만, 일말의 권위 의식은 찾아볼 수 없고 자신을 ‘집수리 건축가’라고 칭하는 자. 한국건축문화대상,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 수상 등 화려한 이력이 있는데도 신축 대신 수리에 매달리는 아웃사이더 건축가. 하지만 사회 통념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건 비로소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한 ‘진짜 고수’만이 행할 수 있는 소신의 발로다. 디자이너 권의현이 일찌감치 건축가 김재관의 철학을 이해하고 닮고 싶다 생각한 것도 이 지점이리라. “이렇게 주목받는 기간이 얼마나 갈까요?” 짧게는 2년이면 끝날 것 같다며 고민이 많다는 디자이너 권의현은 ‘자신만의 길 찾기’라는 인생의 숙제를 푸는 길목에 서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숙제를 대신 해주지는 못하지만, 언제나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힌트를 얻는다. 경험을 나눠주는 선배는 후배의 가능성이란 꽃에 양분을 주며 희망을 얻는다. 이날, 이 둘의 만남은 그러한 의미에서 서로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넣었다.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권의현(이하 권) 안상수 선생님의 파주 타이포그라피 학교 ‘파티’ 공간도 설계하셨지요?
김재관(이하 김) 2018년에 수리도 했죠. 그리고 크리틱 강의도 했어요. 언젠가 참관한 크리틱 수업에서 학생이 “보시는 대로, 재밌어서 해봤어요”라고 이야기하는데, 교수가 별 말 없이 들여보내더라고요. 돌아서서 성찰, 반성, 뉘우침, 가슴 아픔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게 무슨 크리틱인가요?
권 저도 회화 전공 수업에서 그런 시간이 있었는데, 통상적으로 말을 쿨하게 하는 게 멋있고, 작업에 대해 너무 자세히 설명하는 건 멋지지 않다는 인식이 있는 편이지요.
김 작가는 자신이 만든 물건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또 작가는 잘 팔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크리틱 수업 제목을 ‘오맨’이라고 붙였어요. 공포 영화 <오맨>이 마지막 즈음 죽은 줄 알았던 악마가 다시 살아나는 영화인것처럼 ‘끝난 줄 알았지? 다시 설명해’란 뜻이었지요. 일반인을 앉혀놓고 그가 알아듣게 설명하도록 했어요.
권 와, 끔찍하네요! 하하. 하지만 도움은 많이 됐을 것 같아요. 저도 워낙 예전부터 선생님한테 반한 게 작업에 대한 설명 글이 늘 인상적이었거든요. 뜬구름 잡듯 추상적이지 않고 직관적으로 와닿는 이야기들. 그렇게 잘 표현하기 위한 방법은 뭘까요? 인문학적 독서나 경험이겠지요?
김 저도 그런 줄 알고 한동안 책을 판 적이 있어요. 하지만 결국 책도 경험도 아니에요. 오직 사고의 깊이라고 생각해요. 궁금히 여기는 것, 계속 의심하는 것, 이 호기심과 의심의 반복을 통해 생각이 쌓이는 거죠. 외적 지식이 도움 되기도 하지만, 책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걸 찾느라, 또 읽고 기억하는 걸 꺼내느라 대화에 집중하지 못해요. 지식은 생각의 먹이에 불과합니다. 외워서 하는 프레젠테이션이 감동을 주지 못하
는 이유죠.
건축가 김재관은 영국 옥스포드 브룩스 대학교를 졸업, 현재 무회건축연구소 대표로서 주로 낡은 집을 고쳐 새롭게 부활시키는 일을 한다. “집수리는 삶을 수리하는 것”이라 하는 그는 그간의 작업을 엮어 <수리 수리 집수리>를 출간했다. 작품 사진은 2019년 작업한 ‘암자수리’의 전과 후.
자신의 알맹이를 찾기 위해서는 배워서 채운 것부터 의심해야 한다
권 페이스북 선생님 페이지를 팔로잉하고 있어요. 건축은 원래 때려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인 데 반해, 옛것을 남기고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존중하는 선생님의 철학이 좋았어요. 저도 비슷한 이유로 공사를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현장에서 가벽을 만들었다가 행사가 끝나면 죄다 버리는데, 죄짓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벽도 가구 개념으로 쓸모가 있도록 파티션처럼 만들어요. 처음에는 일일이 설명하는게 어려웠는데, 이제는 그 부분을 알고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김 훌륭한 생각이에요. 그 방향이 참 좋네요. 일에 제한을 두는 거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리사이클 재료로 선택하다 보면 범위가 좁은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방법은 나오니까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여기에 있다면 나머지를 욕심낼 필요가 없어요.
권 그런데 요즘 일을 많이 하다 보니 깊이 있는 생각을 못 해요. 이렇게 이어가다가는 고갈되겠다 하는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니 디자인 공부를 더 하면 깊이가 생길까? 대학원을 가볼까? 하고요.
김 정규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디자이너 권의현의 세계가 생성된 겁니다.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건 자기 아이덴티티를 지우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난 오히려 배웠기 때문에 그걸 지우느라 애쓴 사람이에요.
권 배운 걸 지우다니요?
김 건축을 전공했다는 건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뜻이죠. 공부를 통해 옳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그런데 이건 그야말로 지식일뿐이지 내 것은 아니더라고요. 내가 배운 게 맞는 건가? 하는 의 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책에서 나왔기에 옳다라고 믿은 건 없을까? 대부분의 건축가는 새 건물을 짓지요.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지어야 하는데, 원래 있던 지형을 평평하게 만들고 바위나 나무도 없애버린 도시에서 건물을 지으려니 난감했어요. 그런데 집을 고친다는 건 원래 있던 집에서 시작하면 돼요. 이유가 분명히 있고, 논리적 맥락이 형성되고, 그걸 통해 생각할 수 있 죠. 이 근거에 대한 이런 의심이 지금의 나로 이끈 것 같아요.
권 저도 작업할 때 “마음대로 해주세요”라고 하면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면 필요한 게 뭐냐 끊임없이 물어보죠.
김 문제를 주지 않고 답을 만들라는 건 엄청난 오류예요.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이 디자인이니까요. 비례를 찾고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제한적 조건을 풀어내는 게 바로 디자인이죠.
디자이너 권의현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조형 예술을 공부했다. 공간에서 사용하는 모든 집기를 만들며 기둥이나 벽 대신 쓸모 있는 가구로 구성미를 간결하게 구축해내는 게 그만의 작업 색깔. 작품 사진은 ALAND 뉴욕 브루클린 매장(위)과 퀸마마마켓 정글징글 프로젝트.
지금 인정받는 것이 장기 자랑에 불과한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김 제작은 어떻게 하나요?
권 주로 용접부터 제가 다 해요. 몸으로 하는 노동이 좋아서요.
김 재능이 있어서겠죠. 누구나 잘하는 걸 하고 싶어 해요.
권 맞아요. 제가 직접 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놀라고 또 좋아해주니까 계속해온 것도 있어요.
김 내가 건축가가 되었을 때 세계적 건축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재능이 그만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열등감에 시달렸지요. 그런데 학창 시절에 전학 온 내가 아무 관심을 끌지못하다가 붓글씨로 인기를 얻었고, 금세 한계에 부딪힌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그들도 결국 잘하는 것만 하는구나. 재능이라는 건 결국 그것밖에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자각하고 비로소 해방이 됐어요. 난 재능이 없으니 잘됐구나 생각했어요. 재주는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어요. 용접, 목공은 당신의 재주예요. 잘 생각해야 해요. 잘하는 것을 멀리해야 다른 쪽이 발달되고, 지금의 재주는 더 필요할 때 꺼낼 수 있거든요.
권 아, 정말 고민하던 거예요. 성실하다는 이미지로 매몰되는 거 같아서 벗어나야겠다는 고민, 또 솔직히 2년 후면 끝날 것 같다는, 고갈되어간다는 불안의 근본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김 또 먹고살기 위한 노동을 치열이라고 정의하면 곤란해요. 작가에겐 다른 종류의 치열이 있어야 하니까요. 일이 3분의 1만 줄어도 편안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되면 작업도 더 좋아지고요.
권 뼈에 박히는 말씀입니다. 일을 오래 하는 게 꿈이에요. 제 분야가 생겨서, “이 파트는 권의현이 잘해” 하고 꾸준히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거요. 선생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김 그동안 경험하고 배운 것을 남의 집이 아닌,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해 사용하며 살고 싶어요. 한마디로 평생 우리 집을 수리하면서 살고 싶다는 거죠. 하하. 대패질, 용접도 하고, 가구도 만들고 싶고요. 의뢰받은 일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누구를 만족시키는 삶에서 주체가 달라지는 거죠. 이젠 그래도 되지 않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