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부자 친구를 옆에 두라지만, 그런다고 어느 날 내가 덩달아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 행복이 가득한 사람과 오래오래 친하게 지내고 싶다. 그 좋은 기운이 내게로 오면 내 하루와 내 일상도 점점 더 좋은 쪽으로 달라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정배·이진주 작가를 만나고 오면서 그들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들처럼 화목한 가정을 가꾸고 싶었다. 장안의 화제인 장항준·김은희 못지않게 밝고, 건강하며, 즐거운 부부의 이야기.

이진주 작가는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지금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개인의 기억과 심리, 그리고 내면을 극사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화풍으로 그려낸다. 이정배 작가 역시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했으며 평면과 입체, 설치와 가구를 넘나들며 활발한 작업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최근에는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가구전 <생활>을 선보였다.
“파주로 들어온 지 18년 됐습니다. 아파트를 얻어 살다가 몇 년 후에 이 집을 지었지요. 파주로 오기 전에는 행주산성 쪽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그 집 전세금이 4천만 원이었는데, 빚이 6천6백만 원이었어요. 아내랑 저랑 각자 대학 등록금 대출이 3천3백만 원씩 있었거든요. 새마을운동 할 때 지은, 다 쓰러져가는 집을 구해 3년을 살았습니다. 겨울에는 연탄을 땠는데, 불을 한 번도 안 꺼뜨렸어요.(이정배 작가의 자랑스러운 웃음) 연탄재는 한곳에 모아놨다 봄이 되면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요.
여덟 장씩 넣었는데, 한 해 1천2백 장 정도 되더라고요. 가구는 동네 목공소 할아버지한테 부탁해 만들어 들이고요. 사는 모습이 나름 아름답게 보였는지 인테리어 잡지에도 나왔어요.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친구들을 불러 모아 잘도 놀았습니다. 가진 것 없고, 뭐 하나 제대로 갖춰놓고 살지도 못했는데 좋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애가 덜컥 태어났어요. 공간이 비좁아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죠.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는데, 문득 파주 헤이리가 떠오르더라고요. 서울에서 머니까 싸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그렇게 이곳에 전세를 구해서 살다가 이 집을 지었습니다. 다 기적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찰스&레이 임스의 키 낮은 의자 LCW에 맞춰 이정배 작가가 직접 만든 키 작은 테이블과 책장, 그리고 오디오 선반이 설치미술처럼 근사하게 어우러지는 거실.

부부의 작품은 따로도 아름답지만, 하나의 그림으로 맞물릴 때 한층 근사해 보인다.
이렇게 인터뷰가 기분 좋게 시작되면 기분이 붕 뜬다. 좋은 기운의 두 사람이 지난 시절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꺼내 보이니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에도 흥이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못살던 시절에도 친구들을 수시로 집에 불러 모으고 <순풍산부인과> 미달이 아빠로 인기를 끈 탤런트 박영규 흉내를 내며 하루하루 즐겁게 산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도 오버랩됐다. 그 정도의 바이브는 아니지만(쉽지 않은 일!) 이 부부에게도 분명 해맑고 따뜻한 기운이 있었다.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돈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이 집 디자인도 직접 해야 했어요. 저희 집을 지어주신 분이 바로 옆에 사는데, 설계에 준공까지 6백만 원에 해주셨습니다. 물론 공사비는 따로고요. 무리해서라도 좀 큰 집을 짓고 싶었죠. 저희 둘 다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잖아요. 큰 작업도 많이 하고요. 저희 둘 작업실을 1층에, 허리가 아프신 어머니를 포함해 우리 식구들 거주 공간은 2층에 몰고, 3층은 빈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현재 3층은 저희 작품을 활용해 공간 실험을 하는 전시장으로 쓰고 있지요. 친구들은 지금도 계속 놀러 옵니다. 건축가, 비평가, 작가를 포함해 친한 친구가 좀 있는데 한번 모이면 와인을 열댓 병씩 마셔요. 진짜 끝도 없이 계속 마시더라고요.(웃음) 저도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고요.” 술 얘기가 나왔으니 부연하자면 이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 중 하나가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 다용도실이었다. 그들이 ‘창고’라 부르는 공간인데, 수납장에 와인과 위스키가 선반마다 가득했다. 그 은근하고 뭉근한 성공의 향기라니. 이정배 작가와 이진주 작가는 “아이고,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연탄 때던 시절을 먼저 들어서인지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그리고 주방에서 발견한 커다란 도자 그릇. “선배인 오만철 작가님 개인전에서 얻어온 작품이에요. 저 큰 사발에 막걸리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다 마시면 그릇을 준다는 거예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애주가 이정배 작가의 말이다. 이진주 작가는 술을 잘 못 마시지만 친구들이 우르르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왁자지껄 웃음꽃 피는 현장의 분위기를 남편만큼이나 좋아한다.

묵상을 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의 게스트룸.
“이게 나무구나, 이게 진짜 나무구나”
장항준 감독이 세상 사랑스럽고 순수한 애처가이듯 이정배 작가 역시 세상 좋은 남편이다. 최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생활’이란 주제로 가구전을 선보인 그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구 작업으로도 유명한데, 그 커리어의 시작점에 아내 이진주 작가가 있다. “이진주 작가랑 1년 반 동거를 하고 결혼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아내 얼굴을 되게 자주 볼 줄 알았어요(당연하지요). 근데 이 친구는 밤 10시부터 새벽 4~5시까지 작업을 하고, 저는 아침에 일어나 작업을 하고 일찍 자는 거예요. ‘여보, 우리 결혼을 했는데 서로 얼굴을 못 보네’ 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아내가 밥도 챙겨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가 밥을 차리고 있는 거예요. 덕분에 요리도 잘하게 됐습니다. ‘이정배식 봉골레’는 친구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합니다.(웃음) 무엇보다 마늘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탈리아 셰프가 한국 마늘은 자기네 것에 비하면 약하다며 두 배를 넣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임신한 아내를 위해 만들어준 키 작은 책상. LCW 체어와 짝을 이루면 어깨가 젖히듯 펴진 상태에서 편하게 타이핑할 수 있는 최적의 사무 공간이 완성된다.

3층에 있는 테이블과 그 너머에 걸린 부부의 작품. 봉처럼 길게 솟은 나무 막대와 기하학적 도형, 섬세하고 밀도 높은 그림의 조합이 근사하다.
그때부터 마늘을 왕창 넣고 조개랑 새우를 곁들입니다. 마지막에는 새우젓을 살짝 더하고요. 생토마토를 짓이겨서 파스타를 만들면 굉장히 프레시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요. 매생잇국이랑 동태탕도 잘 끓입니다. 회도 직접 썰고요.” 그리고 마침내 아내를 위해 만든 책상 이야기.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을지로에 가서 의자 하나를 샀어요. 가짜를 파는 곳인데, 그런 것도 몰랐어요. 찰스&레이 임스의 LCW라는 의자였는데 36만 원을 달라는 거예요. 가짜니까 그 정도이던 건데, 그냥 좋은 의자라 비싸구나 했습니다. 도저히 잊히지 않아 친구한테 돈을 빌려 그걸 사왔죠. 아내가 거기 앉아 있는 걸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데 배가 부르다 보니 의자에 앉아 책을 보거나 앉았다 일어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거기에 꼭 맞는 테이블을 만들어줘야겠다 싶었고, 높이 65cm밖에 안 되는 키 낮은 책상이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놓고 보니 이 의자와 책상의 조합이 글 쓰는 사람한테 너무 좋은 거예요. 의자 등받이가 곡면으로 넓어 등을 펴게 하는 데다 약간 젖힌 채로 글을 쓰니 어깨가 굽을 일이 없어요. 책상 높이도 맞춤해서 편하게 키보드를 칠 수 있고요. 아이를 낳고 보니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자에게 굉장히 불리하더라고요. 수유를 하고 나면 진주 작가 얼굴이 퀭해져요. 애한테 몸속 양분을 다 주는 거잖아요. 밤에 잠도 잘 못 자고요. 그때 아내 이름이 미술계에서 한창 오르락내리락할 때였는데, 아차 하면 육아 때문에 아무것도 안 되겠더라고요. 새벽에 잠이 든 아내를 깨워 ‘조금이라도 그리고 자’ 하며 채근 아닌 채근을 했습니다.”

깊은 구멍 안쪽의 세계처럼 신비로우면서도 아득한 기운을 풍기는 이진주 작가의 작품. 작가로서 본인만의 확실한 좌표가 있는 그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갤러리현대 16번지에서 막 전시를 오픈한 다음 날이었어요. 파주 아파트에 살 때인데, 20만 원을 주고 목공 수업 수강권을 끊어 왔더라고요. 작업대에서 애 밥을 먹이곤 했는데 그게 계속 걸렸던 거예요. 두 달을 잘 배우고 테이블을 만들어 갔죠. 그때 진주 작가랑 저랑 새벽 3시까지 책상을 계속 쓰다듬으면서 ‘이게 진짜 나무구나’ 감탄을 했어요. 그 따뜻한 정서, 묵직하면서도 보드라운 촉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1층 마당에서 작업 중인 이정배 작가. 안쪽으로 남편의 목공방과 아내의 화실이 나란히 자리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동으로 반성 모드. 혹시라도 “저 정도는 아니에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이진주 작가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 “정배 씨 이름이 바를 정正 자에 북돋을 배培 자예요(바르게 북돋운다). 그래서 그런지 저에게도 그렇고 지인에게도 그렇고 늘 도움을 주고 싶어 해요. 제가 꿈꾸고 이루고 싶던 것도 잘 알아 지독할 정도로 계속 푸시를 하고요.(웃음) 임신을 하면 피곤하고 힘들잖아요. 애들 재우면서 같이 잠들 때가 많은데, 그러면 저를 흔들어 깨워요. 한 시간만 그리고 자라면서요. 처음에는 막 짜증을 냈다가 붓을 잡았는데,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또 너무 좋은 거예요. 한 시간이 아니라 네다섯 시간이라도 계속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 개인으로서뿐 아니라 예술가로서, 인생의 동반자로서도 이정배는 너무 좋은 사람입니다.”

4월 18일까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이정배 작가의 가구전 <생활>. 생활 공간을 예술적 풍경으로 만들어주는 다양한 가구 작업을 만날 수 있다.

테이블과 선반, 긴 의자 연작은 물론 스피커 덮개까지 선보인다.
이정배 작가가 목공의 세계에 입문하도록 계기를 만들어준 이도 이진주 작가다. 이정배 작가의 말. “갤러리현대 16번지에서 전시를 오픈한 다음 날이었어요. 파주 아파트에 살 때인데, 20만 원을 주고 목공 수업 수강권을 끊어 왔더라고요. 작업대에서 애한테 밥을 먹이곤 했는데, 그게 계속 걸렸던 거예요. 두 달을 잘 배우고 테이블을 만들어서 갔죠. 그때 진주 작가랑 저랑 새벽 3시까지 책상을 계속 쓰다듬으면서 ‘이게 나무구나’ ‘진짜 나무구나’ 감탄을 했어요. 그 따뜻한 정서, 묵직하면서도 보드라운 촉감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목공에 대한 인식과 감흥이 풍크툼punctum(라틴어로 ‘바늘로 찌르다’는 뜻)처럼 와서 박힌날이었어요.” 그 테이블을 보고 싶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다른 사람 손에….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보고 너무 좋다면서 사갔습니다. 하하. 물론 저렴한 가격에 양도했지요. 저는 그 돈으로 다시 학원에 등록해 목공을 배웠고요.”

서로에게 한결같이 다정한 부부. 이들을 보면 서로를 넘치게 사랑하고 신뢰하는 장항준·김은희 부부가 떠오른다.
그렇게 배운 이정배 작가의 가구는 독창적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한복의 소매처럼 부드럽게 떨어지는 곡선을 가미하고, 상판을 지지하는 다리는 그 끝을 고양이 발처럼 작고 동그랗게 마무리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수축 팽창하는 나무를 위해 가구 한 쪽에 움직임을 위한 홈을 파 넣고 맨살에 닿아도 쓸리는 일이 없도록 몇 번이고 샌딩과 오일링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또 하나의 설치 작품 같은 나무 조명이 들어간다. 삼베와 모시, 견으로 만든 전등갓을 낭창하게 늘어뜨리고 그 안에 작은 전구를 넣은 작품.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어둡게도 더 아늑하게도 더 낭만적이게도 보이는 이 조명은 그 자체로 시 같고, 선비 정신 같다. 이정배 작가와 이진주 작가는 모두 아라리오갤러리 전속. 극사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구멍의 안쪽처럼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진주 작가의 회화와 한결같이 단정하고 예술적인 이정배 작가의 작품 모두 지지층이 탄탄하다. 언젠가 한 점씩 꼭 갖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넘친다. 힘들 때도 웃고, 쓰러져가는 집에 살 때도 공간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포기하지 않고, 막막할 때도 작업을 멈추지 않은 이 부부가 오래오래 환희의 생활을 맛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