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벽돌의 오래된 빌라. 지은 지 30년이 넘은 구옥 안엔 건물보다 나이가 많은 고가구가 빼곡히 놓여 있다. 수집가의 취미인 양 줄지어 늘어선 고가구엔 집주인 파랑~ 씨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담겼다.
예쁘게 꾸민 것으로 모든 용도를 충족한 거실. 언젠가 자신이 만든 소품과 그림을 판매하는 쇼룸으로 활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은평구로 이사하면서 하나씩 수집해온 옛 물건들. 딱 봤을 때 자신의 미감 기준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고가구만 구입한다. 책가도 병풍은 12폭짜리 큰 사이즈인 줄 모르고 구매했다가 당황했다고.
파랑~ 씨의 작업 공간. 이곳에서 업무도 보고, 매일 식단 일기도 작성한다.
문화 기획자 ‘파랑~’. 1집 주인공의 이름을 가명으로 소개하긴 처음이다. ‘이연화’라는 그의 고운 본명을 고집할 수 있었지만, 인터뷰 직후 나는 그의 이름을 활동명으로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파랑 뒤에 붙은 수상한 물결 기호에서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으리라. 그의 이름은 단순히 색을 뜻하기보다 자연의 형상에 가깝다. 어느 날 윤슬의 이미지를 보고는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방향성을 발견했단다. 잔잔한 물결 안에서 작지만 다채롭게 빛나는 윤슬처럼, 소소하더라도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일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파랑~’을 풀 네임으로 지었다는 것. 특수 기호까지 야무지게 붙여서 말이다. 다양한 사람과 연결되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파랑~ 씨는 박물관 콘텐츠를 기반으로 문화 커뮤니티를 기획 및 진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
“미대에서 박물관 교육을 전공하고,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아우르는 박물관에서 굵고 짧게 근무하다가 직접 콘텐츠를 제작하는 프리랜서 문화 기획자가 되었어요. 독서 모임을 하듯 함께 전시 이야기를 나누는 ‘전시 독후감’, 지나온 삶을 회고하고 현재와 다가올 멋진 삶을 응원하는 이른바 서른 살의 성년식 ‘반갑잔치’, 일상품도 충분히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다는 콘셉트로 내 물건을 남들과 공유하며 나를 다시 살피는 ‘호장품’ 등을 기획했죠. 반갑잔치와 호장품은 이곳에 이사 온 후 집을 거점으로 시작한 일이에요. 누군가에게 집은 온전한 휴식일 수 있지만, 저에겐 제 삶과 일을 가꾸는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림으로 돈을 벌고 살 줄 알았을 만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오랜 취미이자 좋아하는 일이라는 파랑~ 씨. 이름처럼 파란색 물감을 사용해 그림을 그린다.
일, 휴식, 식사, 친구와 만남 등 대부분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침실. 병풍 이외에는 모두 높이가 낮은 가구만 들였다.
함께 살던 쌍둥이 동생이 결혼하며 실질적 독립을 이룬 파랑~ 씨는 사실 그 이전부터 ‘혼자 잘 사는 방법’을 강구해왔다. 원하는 대로 집을 꾸밀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그가 맨 처음 집에 들이기 시작한 건 바로 고가구. 책가도 병풍부터 자개장과 상, 수석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집은 옛 물건으로 가득 채워졌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기 때문일까? 대개 중고 거래를 통해 물건을 구매하는 파랑~ 씨는 가끔은 판매자로부터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때도 있지만(고미술품 경매에 관한 책을 선물하는 좋은 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옻칠한 낡은 목가구를 수집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사실 고가구가 너무 좋아서 모으는 게 아니에요. 박물관 유리관 안에 있는 유물과 비슷한 고가구를 직접 품고 살다 보면, 미적 안목을 비롯해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인생을 잘 살아가는 안목이란 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는 본래 리빙 잡지 보는 걸 좋아했는데요, 어느 디자이너가 어떤 시대에 어떤 재료로 만든 가구가 전 세계 사람의 미적 취향을 고양시키고…. 잡지를 읽다 보면 그런 이야기가 너무 멋있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런 가구는 대부분 배를 타고 넘어온,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의 제품이 많잖아요. 문득 내 주변에서도 잡지에 나오는 가구처럼 충분히 멋진 한국형 빈티지 가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저희 집에 있는 자개상도 1970년대쯤 만든 거거든요. 제 눈에는 해외 빈티지 가구만큼 큰 영감을 주는 물건이었고요. 그래서 저와 가까운 곳에서 해외 가구만큼 충분히 멋진 것을 찾기 시작한 거죠.”
국립중앙박물관 굿즈샵에서 구매한 방명록. 집에 놀러온 손님들의 글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귀여운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장식용으로 쓰고 있는 참새 모양 수저받침.
중고 거래로 구입한 연꽃 무늬 의자. 이 의자를 포함해 연달아 세 번이나 붉은 옻칠한 가구를 집에 들였다.
그날 나눈 대화 중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 선생의 조선백자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기자의 마음에 콕 박혀 있다. 가까운 시대의 유물이라 조선백자를 찬기로 사용할 정도로 그 아름다움을 멀리하고 귀하게 여기지 않던 때에 혜곡 최순우 선생은 백자 달항아리의 미를 상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파랑~ 씨는 이 이야기를 풀어내며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진가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실은 촬영 제안을 받았을 때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공간을 가득 채운 고가구들이 ‘너무 익숙해서 빛을 보지 못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내심 사람들의 반응이 걱정됐다는 것.
하지만 그는 해외 빈티지 가구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건 우리가 근사하게 꾸민 공간에서 그 가구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곧장 마음을 바로잡았단다. 가명으로 일하는 것도, 고가구 수집과 전시 기획에 갖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겁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파랑~씨. 하지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누구보다 풍성하고 재미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조금 모자란 10%의 용기를 듬뿍 주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 국립중앙박물관 기증관에서 형태가 비슷한 가구를 발견하고 구입을 결심한 3층 찬탁.
2 선물로 받은 소금 단지. 본래 부정을 막는 용도로 현관에 두는 물품이지만 이곳에 티 코스터를 보관하고 있다.
3 반갑잔치 소품으로 산 십이지신 중 양 동상. 흙이 낀 듯한 오래된 느낌의 마감이 멋스러워 구매했다.
4 구매 당시 크기가 적혀 있지 않아 안 되도 높이가 70cm는 될 것이라 예상한 소형 자개 장식장. 실제로는 품 안에 들어올 만큼 작은 사이즈다.
5 소을크래프트 공방에서 구매한 작품. 작가의 실험작이라 판매 계획이 없던 물건을 구매한 것이다.
6 아주 작은 크기의 손바닥 소반.
7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구매한 보인행 5인 다구.
8 문구류를 보관하는 5단 화문석 상자. 크기가 다른 화문석 함 다섯 개가 세트다.
9 작은 달항아리 세트. 은평구에 와서 구매한 첫 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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