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몸살을 앓는 전 국토를 이방인처럼 떠돌며 찍었고(1980년대, <타인의 땅>), 집단 무의식의 세계를 찍는 영매 역할을 자처했으며(1990~2002, <충돌과 반동>), 꽃이든 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도자처럼 관조했다. (2002~2007, <기>) 이갑철은 카메라로 그 누군가와 계속 선禪문답을 해왔다. 시인 이문재의 표현처럼 “‘기록’하지 않으면서 ‘말’하려고 한” 그의 사진은 마침내 도시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번에도 우릴 부추긴다. 그가 프레임 안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관객이 프레임 밖에서 완성하라고.
‘적막강산-도시징후(Silent Landscape-City of Symptoms)’, ⓒ이갑철 LEE Gap-Chul
텅 빈 충만
함께하지만 서로가 타인으로 사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의 도시.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각박함이 분명히 저 얼굴들에 덕지덕지 묻어 있을 것이나, 그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낯선 존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텅 빈 무위의 도시, 텅 빈 듯하나 온갖 이질적인 것의 긴장으로 가득 찬 도시. 이곳이 바로 적막강산이다.
‘적막강산-도시징후(Silent Landscape-City of Symptoms)’, ⓒ이갑철 LEE Gap-Chul
우리는 서로 누구인지 모른다
훔쳐보는 게 아니다. 단지 길거리 광고판 앞을 지나던 중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이처럼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떠돌 뿐 끝내 일정한 실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벗어나야 할 어떤 번뇌도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과 나는 만나지 않지만 만난다. 대화하지 않지만 이해하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지만 서로 사랑한다. 우리는… 서로 누구인지 모른다.
‘적막강산-도시징후(Silent Landscape-City of Symptoms)’, ⓒ이갑철 LEE Gap-Chul
도시야말로 속세 안 선경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 거리가 없다면, 모든 것이 투명하다면 마음속 미움과 죄를 어떻게 다 감출 것인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가 그 미움과 죄를 삼켜버리기 때문에 우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들판의 모데미풀처럼 뻔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고독과 적막 덕분이다. 고독한 이 도시야말로 속세 안의 선경이다.
‘적막강산-도시징후(Silent Landscape-City of Symptoms)’, ⓒ이갑철 LEE Gap-Chul
빛이 아닌 어둠을 보기 위해
제 무게를 대신 짊어진 그림자처럼 누구에게나 삶은 무겁고도 가볍다. 제 빛을 대신 짊어진 어둠처럼 누구에게나 삶은 사치스럽고도 궁핍하다. 그가 빛을 찍는 이유, 바로 이 어둠을 보기 위해서다. 안 보이면서 보일 것 같은 이상한 것들, ‘여흑(어두운 여백)’이라 부를 도시의 이상한 징후들.
이갑철은 1984년 신구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한 후 카메라 한 대만 들고 서울로 이주했다. 도시 작업을 이어가는 가운데, 우리 땅을 떠돌며 선조들 삶의 정한과 신명을 사진에 담아왔다. <타인의 땅>(1988), <충돌과 반동>(2002), <기氣>(2007) 등 국내외 저명한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8년 중요 예술 서적 출판사인 이탈리아 다미아니 에디토레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그의 사진집을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