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어 황량하던 덕수궁 즉조당이 안쪽부터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에르메스 코리아가 후원한 궁궐 복원 프로젝트의 두 번째 결과물이다.
왕의 평상과 경상 앞에 놓인 철제 은입사 촛대.
창살 문양을 살려 섬세하게 조각한 뒤 옻칠한 좌등.
어떤 시대든 최고 장인은 늘 왕의 부름을 받았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재료를 사용해 아무나 지닐 수 없는 기물을 제작했다. 그리하여 궁은 당대 가장 귀한 재료, 명망 높은 공예가의 혼을 집적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됐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잘 복원한 궁궐을 찾아도 우리는 그 외형만 간신히 살필 뿐이다. 살림살이가 없는 집 안에는 숨결도 없는 법. 오늘날 궁의 보존과 복원에 각 분야 전통 장인의 협력이 절실한 이유다. 에르메스 코리아가 국내 문화유산과 장인의 기술 보존을 위해 ‘장인 지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실제로 에르메스 코리아는 그간 다양한 장기 프로젝트를 지원하며 한국 문화예술 후원의 숨은 조력자 역할을 해왔다. 지난 2015년엔 문화재청과 ‘한문화재 한지킴이’ 협약을 체결해 덕수궁 복원 사업을 시작했는데, 함녕전에 이은 두 번째 궁궐 복원 프로젝트가 2018년부터 지금까지 한창 진행 중이다. 전각 내부를 정비하고 공예품과 각종 생활 집기를 재현해 궁궐에 숨결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인 것이다. 그 두 번째 공간이 바로 즉조당卽阼堂.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신한 선조가 난이 수습된 후 돌아와 임시로 거처한 전각이자 1902년 중화전 건립 전까지 고종이 공식 집무실로 사용한 장소다. “실제로 궁중의 생활상을 보여줄 수 있는 전각에 프로젝트를 집중했어요. 왕의 침전인 함녕전에 이어 집무 공간으로 사용한 즉조당을 택한 것도 그 때문이죠.” 에르메스 코리아와 문화재청의 프로젝트에 자문 역할을 담당해온 아름지기재단 장영석 국장의 말이다.
왕의 평상 위에 올린 하절기용 왕골자리. 말발굽 문양으로 장식했다.
신하의 경상 옆에 놓인 유제 등경.
프로젝트 첫해, 즉조당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것은 왕이 앉는 평상과 경상, 그리고 신하의 집무를 위한 연상과 경상이다. 이는 권우범 소목장이 백골 작업한 뒤 정수화 칠장이 옻칠하고, 안이환·허대춘 두석장이 평상의 금속 장식을 더한 것. 여러 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을 충실히 재현하되, 각 가구의 크기가 조화로운 비례를 이루도록 장인과 자문단이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이어 2019년 3월에는 왕의 평상 위에 올리는 보료, 신하의 방석과 좌등이 각각 제자리를 찾았다. 가장 최근에 완성한 기물은 장침과 사방침, 왕골자리와 왕골 방석, 그리고 철제 은입사 촛대와 유제 등경이다. 우선 장침과 사방침은 왕이 보료 위에 앉을 때 몸을 기대거나 팔을 괼 수 있도록 놓은 일종의 쿠션. 다만, 보료나 솜 방석 자체가 습기에 취약한 터라 여름철엔 사용할 수 없었는데, 그때 이를 대신한 것이 왕골자리와 왕골 방석이다. 현재 즉조당 평상 위에는 한복기술진흥원 박현주 원장이 재현한 말발굽 문양의 왕골자리가 단아하면서도 섬세한 자태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함녕전에 이은 덕수궁의 두 번째 복원 프로젝트 장소는 고종의 집무 공간이던 즉조당이다.
그 아래로 왕과 신하의 촛대가 나란히 자리하는데, 이는 최교준 입사장과 김수영 유기장의 역작. 왕의 촛대는 정교한 은입사기법을 더해 우아함과 중후함을 살렸고, 신하의 촛대는 이 보다 검박하면서도 품격을 갖추기 위해 유제 등경으로 매끈하게 다듬었다. 여기에 김태자 자수장이 제작 중인 병풍과 화로 등이 올 하반기에 완성되면 3년을 이어온 즉조당 프로젝트도 마무리될 터. 이는 우리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물론, 전통 장인이 기술과 노하우를 계승할 수 있도록 보다 근본적으로 이들을 지원하려는 취지를 갖고 있다. 다음 프로젝트의 대상이 어떤 공간으로 결정되든, 이 방향성만큼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옛것이 전하는 가치
네 명의 장인에게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물었다. 저마다의 뜨거운 긍지와 깊은 예술혼 너머엔 장인의 녹록지 않은 현실이 숨어 있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6호
최교준 입사장
작업의 핵심
은입사는 청동, 철, 구리 같은 금속에 은실로 문양을 넣는 세공 기법이에요. 주로 궁중이나 사대부 집안 기물에 쓰던 기법인지라, 그걸 정교하게 재현하는 데 가장 신경을 썼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유물과 최대한 유사하게 제작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
은입사라는 전통 공예 방식이 어떤 것인지 미리 알고 작품을 감상하면 좋겠어요. 전통 공예라는 게 알면 알수록 깊이 빠져드는 매력이 있거든요. 이런 전통을 알게 됨으로써 더욱 긍지를 느끼기도 하고요. 당시 조상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더 재미있지요.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제113호
정수화 칠장
작업의 핵심
칠장으로서 칠의 색감을 맞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옻칠은 6~7회 이상의 붓 작업을 해야 하고, 특유의 건조 방식과 발색 과정도 필요하죠. 특히 발색 과정을 ‘칠이 핀다’고 표현하는데, 작품을 완성한 후 약간 진한 색감이 1~2년에 걸쳐 조금씩 밝아지게 됩니다. 즉 완성 단계에서의 완성도 못지않게 칠이 발색한 후 색감도 고려해야 하지요.
전하고 싶은 말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현대적 감각에 결코 뒤지지 않는 디자인, 선조들의 감각과 감성을 느꼈으면 합니다. 더불어 유물 재현을 위해 쏟아낸 장인들의 혼과 열정을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한복기술진흥원
박현주 원장
작업의 핵심
실물도 없고 실증적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유물을 재현해야 할 때는 선행 연구에 대한 조사 분석에 준거해 재현 지침을 마련해야 합니다. 당시 궁궐에서 사용한 의례용품의 주요 소재와 색상, 문양 등 연구 자료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분석이 유물 재현과 보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전하고 싶은 말
문석(돗자리)은 우리의 온돌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예요. 그만큼 역사가 오래됐고요. 저는 문석이 오늘날의 젊은이에게도 충분히 실용적이고 배울 만한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미래 산업으로서 분명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어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4호
권우범 소목장
작업의 핵심
각각의 집기가 지닌 고유한 선과 비례, 그리고 장식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몇 번이나 현존하는 유물을 실견했지요. 사실 이렇듯 정교한 조각에는 오랜 경험을 지닌 숙련공이 필요한데, 숙련공이 작업을 지속하며 기술을 이어가기 힘든 오늘날의 상황이 아쉽고 우려됩니다.
전하고 싶은 말
집기들의 전체적 어울림을 살피는 것도 좋지만, 각 집기의 조각과 장식 하나하나를 좀 더 자세히 감상하는 방법도 추천합니다. 선 하나의 유려함과 그 선이 여러 개 모여 만든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도 또 다른 기쁨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