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배 카카오벤처스 투자팀 수석은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서 전기컴퓨터공학을 공부하고 스마트폰 시장이 급성장하던 시절에 애플 본사와 삼성전자에서 스마트폰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를 하며 IT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 카카오에서 카카오브레인 설립 및 AI 사업 개발을 담당했고 현재 카카오벤처스에서 해외 투자를 맡고 있다.
카카오벤처스가 하는 일을 소개해달라.
카카오벤처스는 카카오의 100% 자회사다. 카카오의 창립자인 김범수 의장이 2012년 자본금 50억 원을 들여 설립한 개인 회사 케이큐브벤처스가 시초였다. 카카오 같은 회사가 앞으로 더 나와야 한다는 것이 김범수 의장의 설립 취지다. 케이큐브벤처스는 100명의 CEO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투자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스타트업 생태계를 견인할 수 있도록 초기 투자에 집중하는 전략을 펼쳤다. 2015년 카카오에 편입되고 나서 2017년 카카오벤처스로 리브랜딩됐다. 카카오 계열사지만 외부 자금 조달을 통해 펀드를 운용하기 때문에, 중립적인 투자회사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카카오벤처스는 초기 투자자 역할을 하고 있다. 초기 투자란 어떤 의미인가?
흔히 창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밑천이 되는 시드 머니는 3F에서 나온다고 한다. 바로 친구Friends, 가족Family, 바보Fools라고.(웃음) 이렇게 최초의 투자금을 ‘프리 시드’나 ‘엔젤 투자’라고 한다. 이후 여러 단계의 투자가 이어지는데 규모에 따라 시리즈 A, 시리즈 B, 시리즈 C로 올라간다. 시리즈 A 투자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생존보다 성장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즉 정상적인 회사 운영을 위한 궤도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카카오벤처스가 하는 초기 투자는 시리즈 A를 받기 이전 단계를 가리킨다.
벤처 캐피털이 정량적 지표가 없는 초기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투자를 감행하려면 창업가 정신을 중점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매일같이 창업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그만큼 투자 풀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자꾸 보다 보면 어떤 분야에 투자가 잘 일어나는지도 알 수 있다. 이는 해당 분야로 시장 자금이 많이 풀린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투자를 결정할 때 스타트업을 평가하는 뚜렷한 기준이 있거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벤처캐피털에서 회사의 기업 가치를 산정하는 공식이나 일반적인 방법론이 있긴 하지만 재무재표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는 없다. 결국에는 창업자의 레퍼런스를 체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실제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이 사람과 함께 또다시 일할 수 있겠는지를 물어보기도 한다.
투자가 많이 일어나는 분야가 있다고 했는데 최근 분위기는 어떤가?
예전에는 게임 산업에 투자가 집중됐다. 당시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콘솔 게임을 넘어선 모바일 게임 시대가 열렸다. 초기에는 모바일 게임 개발에 들어가는 시간, 자본, 인적 리소스가 부족했기 때문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 게임 위주로 시장이 움직였다. 애니팡, 쿠키런 같은 콘텐츠가 대박 나면서 해당 개발사에 투자한 벤처 캐피털도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이 앞서나가던 모바일 시장에 중국이 끼어들었다. 며칠 만에 게임을 똑같이 카피해서 내놓는데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가벼운 콘텐츠를 만들자니 카피캣이 범람하고, 완성도 높은 게임은 초기 비용이 많이 들어가 리스크가 커지면서 많은 게임 개발사가 문을 닫았다. 카카오벤처스에도 게임 전용 펀드가 있었지만, 요즘은 범위를 확장해서 모바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개발사에 투자한다.
실제로도 카카오벤처스는 모바일용 콘텐츠 서비스 스타트업에 투자를 많이 하더라.
취향 기반 거실 여행 서비스인 ‘남의집’도 작년 카카오벤처스가 투자한 스타트업이다. 집주인과 손님들이 특정 취향을 기반으로 모이는 서비스인데, 남의집 김성용 대표는 카카오 개발자 출신이다. 1인 스타트업으로 시작했는데 카카오벤처스에서 투자받고 싶다고 제일 먼저 찾아왔다. 카카오벤처스와 카카오 본사의 거리가 가깝고 평소 계열사의 실무진들과도 교류하고 지낸다. 그래서 퇴사를 준비하면서 창업이나 첫 투자에 대한 고민이 있는 이들이 카카오벤처스를 많이 고려하는 편인 듯 하다.
스타트업에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인가?
디자인은 늘 목마른 영역이다. 창업가들은 보통 경영인이거나 코딩을 할 줄 아는 개발자 직군이다. 초기 단계 스타트업이 디자이너를 바로 풀타임으로 채용하기는 어렵다. 벤처 캐피털 역시 초기에는 플랫폼의 디자인 완성도를 보고 투자를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디자인에도 신경 써야 하는 단계가 온다. 카카오벤처스가 운영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은 성장 단계에 접어든 스타트업이 필요한 영역의 전문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인사와 프로모션 분야의 코칭을 주로 연계하며, 디자인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코칭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UX 디자이너가 스타트업과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해서 소개해달라는 요청도 많이 온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이너가 공동 창업자인 스타트업 모델이 바람직해 보인다.
디자이너가 공동 창업자인 소개할 만한 스타트업이 있다면?
한동안 VR 분야가 각광 받았고 최근 들어 AR 분야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난해 미국의 AR 협업 플랫폼 개발 스타트업인 스페이셜Spatial에 투자를 결정했다. 스페이셜은 가상 현실에서 원격으로 회의를 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3D 시뮬레이션 공간에 나와 똑같이 생긴 아바타가 등장한다. AI 기술을 활용해 내 사진을 스캔해 만든 것이다.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가상 공간에 모인 아바타들과 같은 스크린을 보거나 3D 모델을 불러오고 웹 검색을 하면서 회의를 진행할 수 있다.
마치 〈킹스맨〉의 에이전트들이 회의하는 장면일 것 같다. 기존 화상회의의 한계점으로 지적된 표정이나 제스처를 읽기 어려운 부분까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스페이셜의 공동 창업자인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이진하 CPO(Chief Product Officer)다. MIT 미디어랩에서 아트&사이언스로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 중 삼성전자에 최연소 상무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내가 삼성에 있을 때와 기간이 겹쳐서 만난 적 있다. 그는 삼성에서 나온 뒤 미국으로 건너가 스페이셜을 공동 창업했다. 사실 스페이셜이 만든 플랫폼은 누구나 상상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다. 그러나 이진하 CPO는 그것을 실제로 구현했고 제일 빨리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스페이셜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페이스북의 러브콜을 받고 있고, 특히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활용도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이셜에는 카카오벤처스에서 거꾸로 투자를 받아달라고 제안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졌다면 투자자가 아니라 스타트업이 갑이다.
앞으로 가능성 있다고 생각되는 분야는 무엇인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그런 측면에서 모바일을 통해 경험이나 가치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인구도 점점 줄어 고령화사회에 접어드는 상황에서 이와 관련된 플랫폼도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카카오벤처스에서 주시하는 현상 중 하나는 젊은 세대가 사용하는 플랫폼이 자주 바뀐다는 것이다. 카카오톡도 지금은 국민 메신저라고 불리지만 10대들은 카카오톡 대신 자기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을 사용한다. 그래서 당장 눈앞의 것보다 다음 세대를 주시해야 한다.
카카오벤처스는 투자한 포트폴리오 기업을 ‘패밀리’라고 부른다. 호칭에서 투자사와 포트폴리오 관계를 넘어선 끈끈한 우정이 묻어난다. 미래의 패밀리가 될 창업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아는 건 안다, 모르면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면서 상호 간 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 설정이 실제와 다르면 피봇을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피봇 과정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카카오벤처스의 1호 투자를 받은 왓챠는 2011년 서비스를 출시할 때만 해도 넷플릭스의 강세 속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려 섞인 시선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반등을 했다. 창업가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